"흑흑…. 아빠… 큰일 났어…."
딸에게 걸려온 반가운 전화에 수화기를 든 박모(66)씨는 흐느끼는 아이의 목소리를 듣자 금세 낯빛이 어두워졌다.
"무슨 일이야? 사고라도 났어?"
"친구가…. 사채 돈을 빌렸는데…. 흑흑…. 내가 보증을 서줬어…. 나 지금 지하 창고 같은데 끌려왔어…. 나보고 돈 내달래…."
딸아이의 울음 섞인 목소리에 박씨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떨리는 감정을 추스르기도 전에 이윽고 들려온 한 남성의 목소리.
"네. 사채업자 이상철입니다. 아버님이 돈을 대신 갚으시면 따님 머리털 한 끗 안 다치고 집으로 가게 됩니다. 근데, 제가 오늘 돈을 못 보면 따님 몸속에 있는 콩팥 하나 떼서 돈으로 바꿀 겁니다."
박씨는 고민할 겨를 없이 딸을 안전하게 데려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제가 그 돈 해드릴 테니까 우리 딸은 내보내 주세요."
박씨는 납치범이 요구한 3천400만원을 송금하기 위해 자신이 일하는 강원 홍천군 한 편의점에 보관한 통장을 허겁지겁 찾기 시작했다.
이런 박씨의 모습을 이상하게 여긴 아내는 경찰에 "빨리 와달라"고 신고했고,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경찰은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가 의심된다며 현금 인출을 저지했다.
딸 아이의 신변이 걱정됐던 박씨는 경찰의 만류를 뿌리치고 은행으로 달려가 직원에게 3천400만원을 출금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박씨를 뒤따라온 경찰들은 지구대 휴대용 정보단말기(PDA)로 딸과 전화 연결을 시켜줬고 박씨는 딸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지난 9월 20일 홍천경찰서 희망지구대 소속 이경찬 순경과 이재호 경위의 신속한 대처로 박씨는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눈물을 흘렸다.
박씨는 22일 "당시 전화를 받자마자 울면서 말하니 딸인지 아닌지 구분이 잘 안 됐다"며 "딸 휴대전화 번호로 전화가 걸려오니 처음에는 속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다행히 경찰의 도움으로 큰 피해를 보지 않았지만, 당시에는 굉장히 당황스럽고 떨렸다"며 "만약 이런 비슷한 일을 겪으신다면 우선 전화를 끊고 직접 상대에게 전화해서 확인한 뒤 경찰에 신고하시는 게 좋겠다"고 덧붙였다.
가족이나 지인을 사칭해 위급한 상황에 놓인 것처럼 협박하는 보이스피싱 수법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금융감독원에서 발표한 보이스피싱 유형을 살펴보면 30·40대에서는 저리 대출 빙자가 38%, 50·60대 이상에서는 가족·지인 사칭이 48.4%로 가장 많았다.
특히 50대와 60대 이상은 성인 자녀를 둔 세대라는 점을 노린 사기가 많았다.
강원에서도 최근 3년간(2020∼2022년) 지인이나 가족을 사칭해 보이스피싱 범죄로 피해를 본 사례가 9건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실제 지난 1월 강원에서는 보이스피싱 범인이 자녀를 납치했다며 우는 소리 등을 들려주고 공포심을 유발해 피해자에게 현금 500만원을 가로챘다.
범인은 피해자에게 "아들을 납치한 뒤 흉기로 다리를 2차례 찔렀다"며 "살리고 싶으면 편의점에서 문화상품권을 구매해 상품권 핀 번호를 보내라"고 협박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 관계자는 "최근 변작 중계기를 이용해 피해자가 저장해 놓은 가족의 이름이나 전화번호가 뜨도록 조작하는 수법으로 범행하는 경우가 잦다"며 "이럴 경우 실제 가족·지인 본인이 맞는지 직접 전화해 확인하거나, 의심이 드는 경우 다른 전화기를 이용해 112에 신고하는 등의 대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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