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구하러 우주로 향하는 이 장면, "어벤져스 어셈블!" 원조 격입니다.
그런데 지구를 구하러 걸어 나가는 이 사람들 직업 뭔지 기억하시나요? 우주비행사? 나사 과학자도 아닙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지구를 구할 대표는 바로 미국의 시추공들, "세계 최고의 드릴러"이죠.
행성에 구멍을 뚫어 핵폭탄을 넣고 폭파시켜 지구를 구한다는 극히 미국 영웅적 스토리.
그만큼 석유 시추 굴착은 미국의 자부심입니다. 석유 개발만큼은 "우리가 최고야" 라는 건데요.
자 그럼 영화 말고, 현실에서 이 석유 광구, 누가 찾고 파는 걸까요? 엑손? 셰브론? 아닙니다.
오늘 이야기 할 이 기업이 바로 `베스트 드릴러`, 석유·가스 구멍 파는 건 1위입니다.
뉴욕 주식시장에서 생소하지만 궁금한 기업을 조금 더 가까이 들여다보는 `바이 아메리카`
오늘의 기업은 주연보다 더 빛나는 조연. 월가 투자 대가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에너지주.
바로 `슐럼버거` (티커명: SLB) 입니다.
`슐럼버거(Schlumberger)`라고 해서 사실 저도 "응? 무슨 버거?" 했는데…
이게 ch는 묵음이고, 버거가 아닌 `슬럼버제` 가 맞는 발음이라고 하더라구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표기는 슐럼버거로 되어있습니다.
이 회사는 쉽게 말하면 유전을 찾고 시추하는 회사인데요. 어디에 석유 또는 가스가 묻혀 있나 찾고, 어떻게 하면 최적의 설계로 많이 꺼낼 수 있는지 계산하고, 또 직접 건설·생산까지 통합된 서비스로 제공하는 업스트림의 최강자입니다.
여기서 잠깐 석유/가스 산업을 설명해보자면, `업스트림` 상류 부문에서는 석유를 탐사하고 개발 생산하는 단계가 있고, 그 다음 생산된 석유를 운송하고 저장하는 수송, 그리고 생산된 원유를 정제하고 판매하거나 이를 원료로 석유화학제품을 만드는 `다운스트림` 하류 부문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저희가 이름만 들어도 잘 아는 오일 메이저 기업들은 업스트림과 다운스트림을 두루 하고 있는데요. 왜 건설도 시행사, 시공사가 A부터 Z까지 모든 것을 하지 않죠.
오일 메이저들도 유전 탐사와 개발은 외주를 줍니다. 바로 유전 개발 서비스(Oil Field Services.OFS) 회사들에게요.
사실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 시장 규모가 가히 놀랄만 합니다. 시총 기준, 전 세계 1위 업체가 바로 슐럼버거구요. 같은 시장 경쟁사로는 할리버튼(HAL), 베이커휴즈(BKR) 등이 있습니다. 현재 시총은 각각 756억달러, 350억달러, 296억달러 정도. 슐럼버거가 경쟁사 두 회사를 더하고도 넘는 규모죠. 고유가 시기, 2014년에는 슐럼버거 시총이 지금의 두 배 수준, 삼성전자와 맞먹는 덩치였습니다.
이 시장에서도 단연 슐럼버거가 1위를 차지할 수 있는 기반은 바로 `최초`라는 부분인데요.
세계 최초로 전기를 이용해 유전을 찾는 기술이 슐럼버거에서 시작됐습니다. 1926년 프랑스계 독일인인 슬럼벌제 형제가 설립한 `일렉트릭 프로스펙팅 컴퍼니`가 슐럼버거의 모태인데요.
이 형제는 전기 탐침을 이용해 암석층을 매핑하는, 당시로서 아주 혁신적인 유전 탐사 기술을 개발하죠. 그리고 이들은 이듬해(1927년)에 프랑스 북동부 지역에서 전기를 이용한 유전 측정을 세계 최초로 시연합니다. 이후 1934년에 미국으로 넘어와 텍사스주 휴스턴에 슐럼버거를 설립하고 1962년 뉴욕증시에 상장했습니다.
지금은 120여개 이상 나라에 진출해 있고, 세계 최대 석유 매장 국가와 또 해상에서 글로벌 에너지 기업들에게 석유/가스 탐사, 시추를 위한 장비는 물론이고 에너지 생산 원가를 절감하는 디지털 솔루션까지 제공하는 그야말로 종합 유전 개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지역별 매출 분포를 보면 중동.아시아가 36%, 유럽과 아프리카 25%, 북미와 남미가 각각 19%로 골고루 분포되어 있죠.
매출 구성을 보면 유전/가스전 탐사해서 경제적 타당성을 검토하는 부문이 22%, 유정을 뚫는 분야가 33%, 필요한 생산장비와 시스템 판매 부문이 30%, 그리고 에너지 개발 현장을 관리하는 IT 솔루션 소프트웨어 부문이 약 15% 차지합니다.
올해 실적은 2015년 이후 가장 높은 분기 마진을 기록할 정도로 좋았는데요. 그 이유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다시 전통 에너지 개발이 부상했기 때문이죠.
새로운 유정 건설 사업뿐 아니라, 과거 시추만 해놓고 유정 완결을 안 한 시추정들을 다시 특성화하는 사업이 좋은 성적을 견인했습니다.
기업의 강점은 위기를 맞이했을 때 어떻게 해결했는지 보면 알 수 있죠.
슐럼버거 역시 많은 고비들이 있었겠지만, 2010년 이후 두 가지 굵직한 사건만 살펴보자면, 셰일붐으로 인한 저유가와 그린에너지로의 전환이었습니다.
먼저 미국 셰일회사들이 줄줄이 도산하기 시기로 가볼까요. 있던 유정도 닫다 보니 살아남기 위해서는 슐럼버거도 다른 접근의 방식이 절실했습니다.
이 때 슐럼버거가 꺼내 든 카드는 바로 고정 일시불 가격으로 번들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괄턴키`(Lump Sum Turn Key)` 방식이었는데요. 일정한 기간 내 완전한 유정을 인도하는 것을 하나의 프로젝트로 판매하는 것이죠. 이는 흔히 해외 건설, 플랜트 계약 방식에서 자주 볼 수 있었는데, 이를 석유시추 건설에 도입한 겁니다.
한 계약당 2~3년에 걸쳐 최소 수십개 이상의 유정을 건설하는 장기 프로젝트로, 유정 설계부터 운영 실행, 완공에 이르기까지 유정 시추의 모든 위험을 슐럼버거가 감수해야만 합니다. 사실 이게 구멍 열 번 파야 1개 기름이 나오던 과거였다면 불가능했겠죠.
하지만 이를 가능케 한 것은 그동안 쌓인 데이터와 IT 기술의 발달이었습니다. 슐럼버거의 기술담당 부사장은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디지털 변환, 데이터 부석, 머신러닝`이었다"고 설명했죠. 이제 슐럼버거는 머신러닝을 통해 엄청난 양의 시추 데이터를 학습하고 실제 시추 과정에서 이상 징후를 찾아내 솔루션까지 스스로 내는 AI 유전 자동 시추시스템의 실증을 마친 상태입니다. `유전업계 자율주행차`라 불리는 이 시스템이 또 한번 업계를 뒤바꿀 전망이죠.
또 다른 고비는 바로 세계적인 에너지 대전환입니다.
바이든 대통령도 출범 전부터 탄소 중립 등 기후변화 대응을 강조해오며 석유를 비롯한 전통 에너지 업계는 큰 터닝포인트를 맞이했는데요.
이에 슐럼버거는 올해 10월, 100년 가까이 된 사명을 `SLB`로 바꿨습니다. 티커명과 새 이름이 같죠. `균형 잡힌 지구를 위한 에너지 혁신`을 기치로 내걸고 새로운 출발을 선포했습니다.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한 기술도 업계 최초로 런칭하고 있는데, 그 중 한 예를 들면 석유/가스 생산시 생산량을 늘리고, 배출되는 탄소양을 줄이는 클라우드 디지털화 솔루션을 런칭했구요.
석유과 가스를 뽑아낸 뒤 남은 공간에 이산화탄소를 집어넣는 CCS 기술 개발에도 주력하면서, 향후 큰 먹거리가 될 탄소배출권 시장을 정조준 하고 있죠.
아까 이야기한 월가에서 슐럼버거를 주목하는 이유는 먼저 전세계가 2015년 이후 약 7년여간 석유와 가스, 전통 에너지에 대한 투자가 적었습니다. 그러다 러시아 사태가 터지면서 과소투자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데요. 결국 그간 미뤄왔던 투자들이 이제 이뤄질 가능성은 높고, 주가는 셰브론, 옥시덴탈 같은 에너지 기업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상승 여력이 남았다는 거죠.
또 2023년 경기 침체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상황에서 에너지 섹터만큼은 현금도 빵빵하고, 이익 증가세를 지속할 것이란 기대가 매력을 더합니다.
왜 바이든도 에너지 기업들을 두고 "하나님보다 돈 잘 버는 회사"라고 했죠. 물론 엑손모빌을 콕 짚긴 했습니다만, 내년 국제유가가 보수적으로 90달러대, 월가 IB 대부분이 다시 100달러를 넘어 세자릿수대로 올라갈 것이란 전망을 내놓고 있는 만큼, 에너지 섹터 내 옥석 찾기는 계속 될 전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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