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실리콘밸리은행(SVB) 파산 사태에 조 바이든 미 행정부가 신속히 '예금 전액 보호'라는 대책을 전격 발표한 것을 두고 역풍 조짐이 감지된다.
미 정부의 주장대로 혈세가 공적자금으로 투입되지는 않는다고 해도, 예금 지급을 위한 대출 허용 등이 사실상 '구제금융'과 다를 것이 없어서다.
미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13일(현지시간) "금융 시스템 훼손을 방지하려는 포괄적 정책 패키지를 두고 연방정부가 또다시 월가 구제에 나선 것 아니냐는 의문이 고개를 들고 있다"며 이같이 지적했다.
전날 미 재무부,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연방예금보험공사(FDIC)는 SVB 법상 보호한도를 넘어가는 전체 90% 이상의 예치금까지 모두 보호하겠다고 밝히며 패닉으로 인한 대량 인출사태, 즉 '뱅크런'의 연쇄 발생을 막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SVB 붕괴 사태의 불똥이 금융계 다른 영역으로 옮겨붙는 것을 조기에 차단하겠다는 의도로, 실제 이튿날 뉴욕 증시 등 지표가 빠르게 안정되면서 단기적으로는 효과를 보는 듯한 모습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건전한 시장 질서가 흐려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금융기업의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를 부추길 수 있다는 이야기다.
스티븐 켈리 예일대 금융안정프로그램 선임연구원은 "이번에 연준이 한 일은 은행 시스템 전반에 있어서 금리에 따른 위험에 보험을 들어준 것"이라며 "나는 이것을 '시스템 구제금융'이라고 부를 것"이라고 말했다. 민간부문의 실패를 공공부문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메웠다는 점에서 현실적으로는 구제금융과 마찬가지라는 지적이다.
켈리 선임연구원은 "이는 향후 상황이 잘못돼도 연준이 개입할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기업들이) 리스크를 감수하는 행위를 부추길 수 있다"며 "(정부의) 비상 조치가 어디서부터 시작될지에 대한 기대치를 끌어내리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NYT는 2008년 금융위기 당시 미국 정부가 세금을 투입해 대형 은행 등 금융사들을 구제하고 이들 임원진의 잘못된 의사결정에 불이익을 주지 않는 '대마불사' 전례를 만들어 놓은 탓에 '구제금융' 자체가 욕설에 가까운 표현이 됐다고 지적했다.
미 정부는 비판 가능성을 의식한 듯, 혈세 투입이 없으니 이번 조처는 '구제금융'이 아니라고 미리 선을 긋기는 했다.
바이든 대통령 역시 SVB 대책 발표 직후 연설을 통해 위험을 알고도 은행 주식과 채권 등을 산 투자자들은 보호하지 않을 것이라며 "그게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또 "어떤 손실도 납세자가 부담하지 않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에도 비판 여론은 확산하고 있다.
공화당의 조시 홀리 연방상원의원은 연준이 예금 전액 지금을 위해 FDIC의 예금보험기금(DIF)을 끌어다 써 손실을 내는 것 자체가 납세자에 부담을 전가하는 행위라고 주장하며 "투표도 없이 납세자들이 구제금융 비용을 지불하도록 하는 방법을 찾은 것"이라고 꼬집었다.
정부로써는 뱅크런을 막기 위해 불가피한 결정이었다는 옹호론도 있다.
펜실베이니아대의 금융 전문가인 크리스티나 스키너 교수는 "큰 그림에서는 해야만 할 일을 한 것"이라고 정부를 두둔했다.
다만, 스키너 교수조차 "금융 시스템이 문제에 처했을 때 정부가 개입해 혼란을 해결해줄 것이라는 생각이 커지고, 금융계의 도박 행태를 부추길 수 있다"며 "언제나 도덕적 해이가 문제"라고 언급했다.
미 정부가 파산한 SVB 및 시그니처은행의 임원들이 인수·합병시 거액의 퇴직금을 보장해주는 '황금 낙하산' 조항을 적용받지 못하게 막을지도 관심거리다. 미 재무부와 FDIC는 아직 이에 대한 언급을 내놓지 않고 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규제 설정 작업을 맡았던 대니얼 타룰로 전 연준 총재는 "도덕적 해이에 대한 우려, 그리고 시스템이 과연 누구를 보호해야 하는지에 대한 우려가 다시 주요한 쟁점이 됐다"고 말했다.
(사진=연합뉴스)
한국경제TV 디지털뉴스부 박근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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