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임금 심의, 또 법정시한 넘겼다"
우리는 이런 뉴스를 매년 접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최저임금위원회(최임위)에서 매년 내년도 최저임금 시급 수준을 결정하는데요.
최임위는 심의 요청을 받은 날부터 90일 이내(6월말)까지 최저임금 수준을 의결해 고용부 장관에게 제출해야 합니다.
하지만, 최저임금 제도가 시행된 1988년 이후 매년 회의가 열렸지만, 법정 기한 내 심의를 마친 것은 8번에 불과합니다.
지난해의 경우 8년 만에 가까스로 시한을 지켰죠.
최저임금 결정이 자꾸 미뤄지는 건, 노동계와 경영계의 치열한 기싸움 때문입니다.
최저임금을 정해야 하는 마지막날이 됐는데도, 노동계는 '대폭 인상'을, 경영계는 '사실상 동결' 입장을 고수하며 팽팽히 맞서고 있는 장면은 이제 익숙하기만 합니다.
최저임금 결정과정에서 매년 노사의 극한 힘겨루기와 여론 싸움으로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의 피로감만 높아지고 있는데요.
이달에도 내년도 최저임금을 논의하기 위해 두 번의 최임위 전원회의가 열렸지만, 어김없이 인상 폭과 적용범위를 놓고 노동계와 경영계간의 공방만 반복됐습니다.
노동계는 고물가로 인한 생계난에 내년 최저임금을 1만2천원까지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경영계는 경기위축과 자영업자 대출 급증 등 경제 상황을 고려해 동결을 요구하며 양보 없는 대립을 이어갔기 때문이죠.
특히 이번엔 최임위가 판단의 기초자료로 삼는 한국통계학회의 비혼 근로자 월 생계비를 놓고도 노사 간 신경전이 벌어졌는데요.
우선 노동계는 지난해 기준 '비혼 단신(결혼하지 않고 혼자사는 근로자)의 한달 생계비'가 전년보다 9.3% 늘어난 월 241만원으로 조사됐다는 점을 들어 최저임금 대폭 인상을 주장했고,
경제계는 이 자료는 고임금 계층의 소비지출을 포함한 평균값으로, 최저임금 심의자료로 활용하기에는 적절치 않다고 맞서고 있습니다.
● '협상'과 '양보' 없는 노사합의 최저임금 결정
최저임금을 결정하는 기본 원칙은 협상과 합의입니다.
최임위는 노동계와 경영계, 공익위원이 9명씩 같은 수로 참여하는데, 늘상 노동계와 경영계의 입장 차이가 워낙 크다 보니 서로 의논해서 결정하는 건 사실상 꿈 같은 얘기였죠.
결국 공익위원들이 내놓은 안을 놓고 표결로 아슬아슬한 절충점을 찾곤 했는데요. 때문에 어느 쪽도 불만일 수 밖에 없는 결과지를 받아 들기 일쑤였습니다.
공익위원들이 매번 캐스팅보트를 쥐게 되면서 최저임금에 대한 공정성과 신뢰성 논란도 끊이지 않고 있는데요.
공익위원들은 대부분 학계 인사로 이뤄져있지만, 정부가 추천하기 때문에 정부의 입김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우려가 나오기도 합니다.
특히 올해는 노동계가 윤석열 정부의 '노동개혁'을 권고한 미래노동시장연구회 좌장으로 활동했던 권순원 숙명여대 교수(공익위원 간사)의 사퇴를 요구하며 장내 시위를 벌이면서 첫 전원회의는 시작도 못한 채 파행으로 얼룩지기도 했죠.
누구에게나 최저임금이 일률적으로 적용된다는 점도 최저임금을 둘러싼 노사간 기싸움의 단골 소재입니다.
경영계는 최근 수년간 최저임금이 가파르게 오른 탓에 영세 소상공인들이 대부분인 숙박·음식업 등에선 최저임금조차 주기 힘들어졌다며 이들 업종의 최저임금을 낮게 설정하자는 '업종별 차등 적용'을 주장해 왔는데요.
현행 최저임금법 제4조1은 '최저임금을 사업의 종류에 따라 차등 적용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최저임금제도 도입 첫 해인 1988년 10인 이상 제조업에 한해 적용됐을 뿐, 노동계의 강한 반발로 30년 넘게 사문화됐습니다.
지난해 최임위에서도 경영계는 업종별 차등화 방안을 표결에 부쳤지만 부결됐는데요.
다만 이후 정부는 차등화의 파급효과 등을 따져보기 위해 연구용역을 진행했고 지난 3월 완성된 보고서는 최저임금위에 제출됐지만, 여전히 노동계에서는 논의할 가치도 없다고 선을 긋고 있습니다.
최근 2차 회의에서도 '최저임금의 사업의 종류별 구분 여부'에 대해서는 논의의 첫 발도 못떼고 다음 전원회의로 넘겨졌습니다.
● '노사협의의 묘미'로 최저임금 결정의 유연성 높여 본다면….
코로나19 여파에 고물가·고금리·고환율·고임금까지 겹치면서 중소기업·소상공인 업계는 그 어느 때보다 내년도 최저임금을 업종·규모별로 차등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데요.
업종별 차등화를 놓고 좀처럼 노동계와 경영계간의 입장차를 좁힐 수 없다면, 개별 사업주와 근로자 간 협상의 길이라도 터주자는 의견도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최세경 중소벤처기업연구원 정책컨설팅센터장은 최근 열린 최저임금 관련 심포지엄에서 "해외처럼 국가 기준 최저임금 인상률을 낮추는 대신에 그 이상의 부분을 노사합의로 허용하는 방식으로 하면 합리적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노동계는 특정 업종과 일정 규모 이하의 사업장에 더 낮은 최저임금을 적용한다면 해당 업종이 '저임금 일자리'라는 부정적 인식과 구인난이 심화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상황과 협의 여부에 따라 최저임금을 더 올릴 수 있다는 전제조건을 달면 괜찮지 않겠냐는 얘기입니다.
최저임금 결정기준의 객관성과 전문성이 확보된다면 최저임금을 노사 양측의 힘의 경중이나 정치적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한층 더 쉽게 노사합의를 이뤄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독일의 경우 전문적이고 객관적인 자료, 구체적인 지표나 산식을 결정기준으로 삼아 최저임금위의 토론과 협상이 이뤄지기 때문에 노사가 서로 수긍하고 인정하는 분위기라고 합니다.
최임위가 이달 초 홈페이지에 공개한 '국외 출장 보고서'에 따르면 매년 이듬해 최저임금 수준을 결정하는 한국과 달리 독일 새 최저임금을 적용해 갱신하는 기간은 2년입니다.
신뢰성 있는 자료를 확보해 실증 분석을 통한 결과를 얻기 위해서라는데요.
스위스 제네바주의 경우 법으로 정해진 금액을 물가에 연동하는 방식으로 최저임금이 결정됩니다.
모두가 신뢰할 수 있는 객관적 지표인 물가 수준을 활용해 최저임금 인상 수준에 대한 소모적인 논쟁을 막고 있다고 보고서는 전했습니다.
● 최저임금제도, 노사 기싸움만 부르는 골칫덩어리 아니다
지난 2010년 영국의 정치연구학회가 정치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과거 30년간 수많은 정부정책 중 가장 성공한 정책으로 최저임금 인상이 선정됐습니다.
제도 도입 당시 최저임금제도는 부가적인 기업비용과 실업을 야기한다는 이유로 보수당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최저임금 인상과 함께 실업률은 하락세를 보였고 2000년 이후 고용, 일자리 등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아 오늘날 영국의 최저임금제도는 보수당의 지지를 받고 있는 정책으로 자리매김했죠.
영국의 최저임금제도가 논쟁 없이 정착될 수 있었던 건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최저임금을 매년 약 3%씩 정도 서서히 올리는 등 급진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분석입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문재인 정부 첫해인 지난 2018년 16.4%, 2019년 10.9% 등 가파른 최저임금 오름세에, 출구 없는 노사간 싸움이 더 심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업종별, 규모별 차등 적용 문제도 당장 전면적으로 도입하기 보다는 '업종별, 사업장별 노사간 협상'의 여지를 두는 합리적인 대안으로 보완해 나가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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