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병헌의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얼굴이다.
영화 ‘비상선언’, ‘남한산성’, ‘백두산’, ‘남산의 부장들’과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우리들의 블루스’ 등 다양한 작품에서 대체 불가한 존재감을 발휘해 온 대한민국 대표 배우 이병헌. 그가 ‘콘크리트 유토피아’(감독 엄태화)를 통해 또 한 번 잊을 수 없는 캐릭터를 선보인다.
오는 9일 개봉하는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대지진으로 폐허가 되어 버린 서울, 유일하게 남은 황궁 아파트로 생존자들이 모여들며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린 재난 드라마다. 이병헌, 박서준, 박보영, 김선영, 박지후, 김도윤 등이 열연했다.
“아파트 하나만 살아남았다는 만화 같은 설정에 ‘재밌겠다’ 싶었어요. 시나리오를 읽어보니 제가 기대했던 것만큼이나 인간성에 대해 깊은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절대 선과 악도 없고 보통 사람들이 극단적인 상황에서 벌이는 갈등이라서 더 마음에 들었고요. 영화가 전반적으로 현실적이고,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긴장감이 커지는 데 중간 중간 이상하게 피식피식 웃게 되는 블랙코미디적 요소가 있어요. 그게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라 생각해요.”
이병헌은 극 중 김영탁 역을 맡았다. 황궁 아파트의 새로운 입주민 대표로 선출된 영탁은 외부인으로부터 아파트를 지키기 위해 어떤 위험도 마다하지 않는 투철한 희생정신과 강인한 카리스마로 모두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는 인물이다.
“처음엔 가족들과 본인의 삶을 모두 잃어버린 무기력하고 평범한 사람으로 그려내려 했어요. 그러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권력의 맛을 느끼고 그게 아주 기형적인 형태로 변하게 되는데, 이 자체가 영탁의 포인트라 생각했어요. 조금씩 변해가는 심경의 변화에 중점을 두고 연기했어요.”
친근한 이웃의 소탈함과 속내를 알 수 없는 날카로움이 공존하는 캐릭터로 분한 이병헌은 치밀한 캐릭터 연구 끝에 아파트 내에서 점차 영향력을 넓혀가는 영탁의 변화를 밀도 깊은 감정선으로 표현해냈다.
“내가 의도한, 혹은 내가 보여준 감정이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지 않으면 어떨까 할 때도 있어요. 스스로를 믿고 내가 연기한 감정이 맞다고 보여주면 그게 맞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럼에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직전엔 그런 불안감이 마구 생겨나요. 어떤 인물이든 보편적인 인간의 감정선으로 접근하고 상황에 몰입하려고 해요. 시나리오에 나와 있는 인물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왜 이렇게 행동할까’를 끊임없이 생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그 인물이 가진 복잡미묘한 감정을 나 나름대로 추측하게 돼요. 촬영 내내 그 감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죠. 마치 조건반사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카메라가 켜지면 그 인물이 될 수 있도록요.”
첫 등장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영탁의 헤어스타일은 재난 상황 속 점점 거칠어지는 머릿결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M자형 이마와 뾰족하게 서 있는 스타일을 통해 타협 없이 강직하게 살아온 캐릭터의 개성을 한층 배가시켰다. 디테일한 설정을 더해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은 이병헌은 비주얼까지 완벽한 드라마틱한 변신을 보여준다.
“처음에 스태프들이 영탁 캐릭터로 몇 가지를 보여줬는데, 지금 그 스타일이 제 마음에 들었어요. 왜 보면 머리가 두껍고 빳빳해서 옆으로 머리가 계속 자라는 사람이 있잖아요. 단면이 보일 정도로. 그래서 정말 좋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제가 좀 더 아이디어를 냈죠. 여기 이마를 약간 M자로 만들면 어떨까. 완전 파지는 말고 ‘아, 저 사람이 조금 더 있으면 M자가 확연하겠다’ 싶은 정도로요. 그렇게 스타일이 완성됐는데, 다들 좋아했어요. 그런데 내가 하자고 해 놓고 거울을 보니까 제 팬들이 다 날아갈 거 같더라고요. 이거 어떡하지 했어요. 그래도 뭐 재미있다고 하니까 했어요. 영탁이 점점 권력이 생기면서 머리카락이 더 뻗쳐 나가요. 초반과 후반과 머리카락의 각도가 좀 다를 거예요. 갈수록 성게 같은 느낌이죠. 다만, 그 변화를 모르게 줘야지 그걸 과하게 하면 그 순간 이상해지니까 섬세하게 했어요.”
영탁은 주민들을 이끌며 보급품을 가져오는 역할을 한다. 특히 보급품이 풍족해지던 날, 마을 사람들과 모여 잔치를 벌이며 곡 ‘아파트’를 부르는 장면이 등장한다.
“그 시퀀스는 애초에 콘티에 있었어요. 그날 촬영이 잡혔을 때 이 장면이 잘 만들어지면 정말 중요한 키포인트가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애초에 콘티가 있어서 그걸 머릿속으로 그릴 수 있었어요. 감정적으로 연기하는데 도움이 됐죠. 비하인드라면 노래를 부르기 전에 실제 앞에 추는 아재춤이 제 후배한테 배운 거예요. 윤수일 선배 옛날 영상을 보니까 무대에 서서 율동 없이 노래를 부르시더라고요. '어떡하지' 하다가 춤을 춰야 할 것 같았어요. 후배가 평소에 노래를 부르면서 추는 춤을 보여주는데 괜찮았어요. 진짜 아재춤 같더라고요.”
엄태화 감독이 “이병헌이 캐릭터의 사연을 얼굴 표정으로 한 순간 다 표현해내는 장면을 보면서 ‘아 이게 진짜 영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전할 만큼 좌중을 압도하는 연기와 완벽한 몰입을 보여준 이병헌은 ‘콘크리트 유토피아’를 통해 전에 없던 캐릭터를 선보이며 관객들에게 눈을 뗄 수 없는 몰입감을 선사한다.
“일단 대본에 집중했어요. 우선 대본에 담긴 인물을 진짜 살아있는 사람처럼 그려내는 게 첫 번째 단계였죠. 이후 감독님과 대화하며 새로운 아이디어를 붙여냈고, 이 인물이 조금 더 입체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했어요. 조금 더 상황이 재밌게 만들어질 수 있도록 대화와 회의를 반복했어요. 저도 나한테 이런 얼굴이 있었나? 놀란 장면이 있었어요. 모니터를 보면서 나 스스로도 무서웠던 느낌이 있어요. ‘이게 뭐야 왜 이래 CG야?’라는 말이 나왔죠. 왜 이런 눈빛과 얼굴이지? 이런 얼굴이 나한테 있었나? 나한테 놀랐던 경험이에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이병헌과 박서준, 박보영의 만남으로 올여름 최고의 기대작으로 주목을 받았다.
“박서준은 긴 시간 동안 봐왔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늘 ‘허허허’하고 건강한 웃음을 지어요. 마음씨 좋은 청년 같은 느낌이죠. 인간적으로도 후배 배우로도 참 괜찮아요. 또 카메라가 돌아가면 미묘한 감정을 연기하더라도 예민함과 섬세함을 살려서 표현했어요. 박보영은 저희 회사인데도 그동안 거의 만날 일이 없었어요. 이번 작품을 촬영하면서 자주 마주치게 됐죠. 저도 박보영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과속스캔들’이었어요. 예쁘고 귀여운 줄만 알았는데, 나중에 작품 촬영을 끝나고 나서 자기의 마음가짐이 어땠는지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특히 저와의 대립신에서 ‘선배 너무 무서웠다’고 하는데, ‘난 네가 더 무서웠다’고 말했어요. 그만큼 박보영에 ‘저런 눈빛이 있었어?’라고 할 정도로 캐릭터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다는 게 느껴졌어요. 나중에 돼서야 알게 됐는데, (박보영이) 나랑 붙는 신에 대한 스트레스가 컸는지, 감독님에 말씀을 드렸다고 하더라고요.”
이병헌은 현재 촬영을 진행 중인 넷플릭스 시리즈 ‘오징어 게임2’에 임할 예정이다. ‘오징어 게임’은 456억 원의 상금이 걸린 의문의 서바이벌에 참가한 사람들이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해 목숨을 걸고 극한의 게임에 도전하는 이야기를 담은 넷플릭스 시리즈. 이병헌은 ‘오징어 게임’에서 서바이벌 게임의 판을 조종하는 프론트맨 역을 소화했다.
“사람들이 계속 궁금해 하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아직 촬영을 시작하지 않았어요. 처음부터 시즌2를 생각 안 하고 ‘오징어 게임’을 찍었어요. 시즌2에 임하게 되면서 느낀 건 황동혁 감독님이 정말 이야기꾼이에요. ‘오징어 게임2’가 이렇게나 재미있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한국경제TV 디지털이슈팀 유병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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