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공무원과 공공기관 직원들에게 '아이폰 금지령'이 내려진 가운데 최근 뛰어난 스펙의 신제품 스마트폰을 내놓은 화웨이는 자연스레 '애국 마케팅'의 덕을 보고 있다.
화웨이가 내놓은 7nm(나노미터·10억분의 1m) 칩 스마트폰은 이미 3나노 반도체 기반의 삼성전자·애플 스마트폰에는 크게 뒤처지지만, 중국에서는 미국의 압박과 봉쇄에도 화웨이가 '기술 자립'을 해냈다는 상찬이 자자하다.
국제 사회는 중국이 스마트폰 이외의 다른 제품으로도 '애국 소비'를 확대할지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화웨이의 7나노 반도체 내장 스마트폰인 '메이트 60 프로' 출시는 미국을 겨냥해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공격으로 보인다. 애초 9월로 예정됐던 출시 시점이 8월 29일로 당겨 같은 달 27일부터 3박4일 방중 예정이었던 지나 러몬도 상무장관을 겨눴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국이 러몬도 장관 방중 이틀째인 28일 양국 상무장관 회담에서 '디리스킹'(위험 제거) 완화 또는 철회, 그리고 무역 제재 해제를 요구했는데도 미국이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자 대응 카드로 메이트 60 프로 출시를 꺼냈다는 분석까지 나온다.
중국은 그동안 미국의 전방위적인 첨단 반도체 기술 차단 공세에 밀리는 형세였으나, 이번에 한방을 날린 셈이다.
첨단 반도체 원천기술을 가진 미국은 한국·대만·일본·네덜란드 등과 공조해 중국 상대로 5세대 이동통신(5G)용 반도체와 관련 기술, 투자까지 차단해왔지만 화웨이의 7나노 반도체 스마트폰 출시로 인해 미국 포위망을 뚫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문제의 칩은 중국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기업 SMIC(中芯國際·중신궈지)의 2세대 7나노 공정 칩 '기린 9000s'로 확인됐다. 통상 네덜란드 ASML이 독점 생산하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가 있어야 7나노급 반도체 생산이 가능하다고 보는데, ASML이 이 장비의 중국 수출을 금지했는데도 중국이 어떻게 7나노 칩 양산에 성공했는지 현재로선 미스터리다.
중국에선 현재 구매 대기까지 필요할 정도로 화웨이의 이 제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첫 공급분은 출시 이후 며칠 만에 동났고, 구매 예약도 줄을 잇고 있다. 새 폰을 먼저 산 사람이 웃돈을 주고 되팔아도 눈 깜짝할 새 팔린다.
화웨이는 구체적인 스펙을 공개하지 않았지만, 메이트 60 프로의 다운로드 속도는 500Mbps(초당 메가비트)로 통상 중국 4세대 이동통신(5G) 휴대전화의 5배 수준이다. 가격은 960달러(약 128만원)부터 시작해, 아이폰 14 프로의 999달러(약 133만원)보다도 싸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의 칼럼니스트 앨릭스 로는 8일 칼럼을 통해 "화웨이의 새 폰이 전국적으로 애국심을 불러일으켰고, 화웨이의 주가가 급등했다"며 "이것이 바로 중국 지도자들이 주식 시장을 부양하면서 민족주의를 드높이는 상업적 하이테크의 성공"이라고 평가했다.
한편 외신에 따르면 최근 공무원과 공공기관은 물론 국영기업 직원들에게 애플 아이폰 등 외국 브랜드 스마트폰을 사용하거나 사무실에 가져오지 말라는 당국의 주문이 전달됐다.
바꿔 말하면 아이폰 대신 '화웨이 폰'을 사용하라는 의미로도 풀이될 수 있다. 이런 메시지는 일반인에게도 바로 통해 8천만명에 가까운 공산당원 주도의 애국 소비로 이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애플은 비상이 걸렸다. 매출의 5분의 1 이상을 중국 시장에 기대고 있어 화웨이 폰 애국 소비가 지속되면 타격이 불가피하다. 아이폰의 최대 모뎀 칩 공급업체인 퀄컴도 가시방석에 앉은 모습이다.
아이폰이 중국 내 고급 스마트폰 시장을 장악해왔으나, 이젠 화웨이의 신제품에 일정 부분 자리를 내줘야 할 것으로 예상돼서다.
시장조사기관 카운터포인트 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아이폰 출하량은 2억2천470만대였으며, 화웨이 새 폰의 등장으로 2024년부터 출하량 예상치 중 1천만대가 깎일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8일(현지시간) 애플 등 미국 기술기업들의 주가는 3.2% 떨어졌으며, 이런 추세는 이어질 전망이다.
화웨이는 2020년 2분기 5천580만대의 스마트폰을 출하해 세계 출하량 1위에 올랐으나, 미국의 제재로 같은 해 4분기 출하량은 세계 6위인 3천300만대로 급감했고 그 이후로도 감소세였다. 3년 가까이 5G 스마트폰을 출시 못 한 화웨이는 이번에 메이트 60 프로를 내놓았다.
중국 당국의 아이폰 등 사용 규제 움직임에 대해 미 하원의 마이크 갤러거(공화·위스콘신) 미중전략경쟁특위 위원장은 로이터통신에 "중국 공산당의 교과서적인 행태"라며 화웨이를 띄우고 서방 기업의 중국 시장 접근을 천천히 밀어내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마크 워너 미 상원의원(민주·버지니아)은 "중국 경제가 정체되면서 외국 기업에 대해 더 공격적인 움직임을 예상할 수 있다"고 짚었다.
외신에 따르면 중국 당국의 지시에 따라 중국 대형 비료 제조업체 일부가 이달 초부터 자국 내 비료업체 일부에 요소 수출 중단을 지시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이미 시장에선 중국이 첨단 반도체 핵심 원료인 갈륨·게르마늄 통제에 본격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내다본다.
중국 상무부는 지난 1∼2일 허베이성 슝안신구에서 왕서우원 상무부 당 위원회(당조) 부서기 겸 부부장(국제무역 담판 대표)과 중국 내 지역별 관련 부문 책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첫 '전국 수출 통제 업무 회의'를 개최했다.
반도체·인공지능(AI)·양자컴퓨팅 등 첨단 기술에 대한 중국의 접근을 배제하는 미국의 디리스킹 공세 속에서도 7나노 반도체 스마트폰 양산에 성공한 만큼 갈륨·게르마늄 수출 통제를 무기 삼아 본격적으로 맞서겠다는 것이다.
미 행정부로서도 그동안 펼쳐온 디리스킹의 그물망을 다시 점검한 뒤 추가적인 공세를 할 것으로 예상된다. 일각에선 2019년 5월부터 화웨이를 겨냥해 5G용 반도체의 중국 수출을 금지해온 미국이 이번에 '4G용 반도체 수출 차단' 카드도 꺼낼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이에 따라 첨단 반도체와 핵심 광물 등을 둘러싼 미·중 간 '하이테크 전쟁'이 한층 격화할 수 있다.
(사진=연합뉴스)
한국경제TV 디지털뉴스부 박근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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