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지 않기를 바랐지만, 저는 찰리 멍거의 마지막 주주총회에 참석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버크셔해서웨이의 주주총회는 '자본주의자들의 우드스톡'으로 불립니다. 투자자들을 위한 세계 최대의 축제라는 뜻이겠지요. 내년을 기약하지 못해 개인적으로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번 인물열전에서는 그의 인생과 함께, 주총을 비롯해 그가 삶의 곳곳에서 남긴 조언과 결정의 일부를 되짚어보려 합니다.
찰리 멍거는 사는 동안 그가 옳다고 믿은 방식으로 성공했으며, 이례적인 성공과 그 방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흔쾌히 나누었습니다. 우리 자본시장에도 이같은 인물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글이 늘어질 수 있어, 아래부터는 평서체로 글을 이어가겠습니다.)
▲운이 좋아 살아남은 일곱 살 아이, 찰리 멍거
1931년 미국 내브레스카 주 오마하에서 7세 어린이가 개에 물려 숨지는 사고가 일어난다. 광견병에 걸린 개는 그네에서 놀던 아이 두 명 가운데 한 명을 택해 물었고, 살아남은 아이는 미친 개의 이빨이 그 때 10센티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았었다는 점을 평생 기억했다. 개는 왜 내가 아닌 옆의 아이를 물었을까, 자신이 살고 그 여자애가 죽은 것은 순전히 행운이었다는 결론을 내린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특별한 인물과 기업의 기록들은 항상 지적 능력과 노력, 그리고 많은 행운이 섞여 있다.’ 1924년 1월 1일생 찰리 멍거는 이 점을 죽기 전까지 잊지 않았다.
▲워런 버핏의 ‘윙맨’이자 스승
‘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은 찰리 멍거에 대해 ‘나와 이상하리만치 닮은 사람’이라 평했다. 실제로 버핏의 큰 성공의 첫 단계에 찰리 멍거가 있었다. 버핏의 운용 자금이 50만 달러 수준이던 시절 한 의사 부부가 ‘당신을 보니 찰리 멍거가 떠오른다’는 이유로 10만 달러라는 거금을 그에게 맡긴 것이다. 1959년 처음 만난 20대의 워런 버핏과 30대의 찰리 멍거는 이후 세계 최대의 투자회사를 세운다.
워런 버핏은 찰리 멍거를 통해 적당한 기업을 싼 가격에 사는 것이 아닌, 훌륭한 기업을 적당한 가격에 사는 법을 익혔다며 그것이 오늘의 버크셔해서웨이를 있게 한 기틀이었다고 회고했다. 찰리 멍거는 버크셔해서웨이에서는 2인자였으나 워런 버핏에게는 스승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평생 겸손 추구한 억만장자
사람들이 자신을 그런 성격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며 종종 불평하긴 했으나, 그는 평생 겸손하려 노력한 사람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낮춘다는 잘 알려진 의미보다 더 높은 수준의 겸손을 추구했다. 그것은 그의 어록에서도, 자선을 비롯한 삶의 결정 곳곳에서도 확인된다. 부고가 나온 다음 날, 월스트리트 저널에 실린 기사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찰리 멍거의 삶은 돈 그 이상이었다'.
지적 겸손은 그의 투자 원칙 목록 가운데 한 자리를 차지한다. 찰리 멍거는 자신의 성공을 스스로의 능력만으로는 이룰 수 없었던 것이라 여겼다. 한 사람의 지식과 능력이 세상의 크기에 비해 얼마나 적은 덩어리인지, 개인의 성취에 있어 사회적 맥락과 운이라는 요소가 얼마나 큰 부분인지를 간과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를 무시하는 이들에겐 공격적으로 대하기도 했다.
▲괴팍하지만 완고하지는 않은
찰리 멍거가 남긴 말과 글들엔 때로 농담과 풍자를 즐기는 신랄한 성격이 관찰된다. 2011년에는 대공황의 원인을 노골적인 언어로 풍자한 글을 공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 틀리더라도 끝까지 고집하는 완고한 인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스스로가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성공한 이유는 스스로가 쌓아올린 아이디어를 잘 파괴하기 때문이라고 봤다. 2019년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올린 생각을 무너뜨릴 수 있을 때 기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찰리 멍거는 정신적으로 유연하고 민첩한 사람이었다.
▲벤자민 프랭클린을 존경한 'Poor Charlie'
그의 어록 가운데 '사람들은 똑똑해지려 하지만 난 그저 바보짓을 하지 않을 뿐이다. 이것이 훨씬 어렵다.'는 말이 있다. 인생에서 똑똑함이 다가 아니라는 말로 들리기는 하지만 찰리 멍거 자신은 천재였다. 17세에 미시건대에 입학해 수학을 전공했으며(졸업은 못했으나) 공군에 입대한 20세 때엔 칼텍에서 공부했고, 하버드대 로스쿨을 졸업했다. 그는 수학도 출신의 투자가이며 성공한 변호사이자 또한 건축가였다.
찰리 멍거는 자신보다 앞서 간 천재이자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을 평생 존경했다(그가 남긴 인터뷰에 따르면 직접 설계한 로스앤젤레스 자택엔 두 사람의 흉상이 있다. 하나가 벤저민 프랭클린이고, 다른 하나는 리콴유 싱가포르 전 총리다). 찰리 멍거가 쓴 책 'Poor Charlie's Almanack(국내에는 '가난한 찰리의 연감'으로 알려져 있으나, 원제의 Poor을 가난보다는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표현에 더 가까워 영어 제목을 그대로 적습니다-기자 주)' 역시 프랭클린이 1732년에 내놓은 책 'Poor Richard's Almanack'에서 영감을 얻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완벽한 인물이 되려 평생 노력한 인물이다. 프랭클린의 절제와 종합적 사고는 찰리 멍거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멍거는 기발한 하나의 아이디어로는 좋은 결정을 내릴 수 없다고 믿었다. 코카콜라의 성공엔 코카콜라의 맛 자체 뿐 아니라 냉장고의 보급이라는 외부 요소들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다중 정신 모형’이나 ‘롤라팔루자 효과’ 같은 말들을 만들어 냈는데, 이같은 복잡한 말들은 결국 종합적 사고를 중요시한 데에서 나온 파생상품이다.
▲아침보다 조금이라도 현명해진 상태로 잠들어야
노년의 찰리 멍거는 끊임없는 독서로 주변의 시선을 끌었다. 그의 집을 돌본 관리인에 따르면 멍거는 노년의 대부분을 오전 6시에 기상해 오후 10시면 잠들곤 했다. 그러나 가끔 그가 책 하나에 빠지면 새벽까지도 창문에 불이 꺼지지 않았다. ‘아침보다 조금이라도 현명해진 상태로 잠에 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유명한 지론이었고, 현명해지는 것의 일부는 분명히 독서에 있었다. 관리인은 찰리의 독서를 ‘개가 뼈를 씹어 삼키는 것’에 비유했다. 찰리 멍거는 이틀이면 책 한권을 독파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충분히 성공한 뒤, 죽기 전까지도 이러한 행동을 유지했다는 점이다.
존 호킨스 제너레이션 파트너스 공동 창업자는 찰리 멍거에 대해 ‘내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 덜 익은 바나나도 미리 사지 않는 노인들과는 다르다’고 평했다. 찰리 멍거는 죽기 직전까지 앞으로 10년, 20년, 30년 이후를 위한 투자를 계속했다.
독서광 찰리 멍거는 앞서 서술한 대로 Poor Charlie's Almanack이라는 저서를 남겼다. 해외 번역을 금지해 완전한 번역본은 없으나, ‘찰리 멍거 바이블’ 등 그의 글과 강연을 엮은 책은 국내에도 소개되어 있으며 수많은 추종자들이 번역한 어록 역시 검색을 통해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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