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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사는 왜 의료자문 동의서를 들이밀까 [슬기로운 금융생활]

장슬기 기자

입력 2024-03-01 07:00  

보험사 제휴 병원에서만 의료자문
대학병원 진단서 있어도 의료자문 강행
"장애 낙인 위한 수단으로 전락"


"의료자문 동의 안 하시면 보험금 지급이 어렵습니다"

* 의료자문이란, 보험사가 보험금 지급 여부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피보험자의 질환 또는 치료과정에 대해 해당 전문의의 소견을 묻는 것을 말합니다.

최근 어린이보험을 둘러싼 의료자문 이슈가 뜨겁습니다. 발달지연 아동들이 크게 늘면서, 언어치료 또는 감각통합치료 등 전반적인 발달 치료를 받는 어린이보험 가입자들 역시 증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정 기간 치료 보험금을 받다보면, 보험사에선 어김없이 '의료자문 동의서'가 날아옵니다. 아동의 언어치료에 대해 보험금을 주는 것이 합당한 지 보험사 자체적으로 의료자문을 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왜 보험사는 발달지연 아동들에게 의료자문을 요구할까요?

◆ 의료자문, F코드를 위한 수단?

만 6세인 A씨의 자녀는 언어 지연으로 병원에서 언어치료를 받아왔습니다. 다행히 한 손해보험사의 어린이보험에 가입했던 덕에 치료보험금 도움을 받을 수 있었는데, 치료 3년차가 지나자 보험사는 '1차 의료자문'을 요구합니다. 아동에 대한 치료 보험금 지급이 합당한지 보험사와 제휴된 병원에서 의료자문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인데,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보험금 지급이 더이상 불가하다는 설명도 돌아옵니다.

결국 A씨는 보험사의 의료자문에 동의했고, 의료자문 결과는 조음문제로 인한 장애(F코드). F코드는 정신 및 행동장애(F04-F99)에 해당하는 코드입니다. '장애'는 일반 지연과는 달리 치료가 불가능한 구조적 문제로 인식됩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A씨의 아이는 언어치료 중 설유착증이 발견, 조음문제 해결을 위해 설소대 수술이 필요하다는 소견이 나와 수술을 하게 되고, 수술 후 결과적으로 조음수준이 상당히 향상됐다는 결과를 받게 됩니다.

대학병원에서도 아이의 조음 문제는 설유착증과 관련이 있다고 보고, 수술 후 개선된 언어검사지와 진단서를 발급해줬으나, 보험사에서는 여전히 1차 의료자문 결과만을 토대로 아이를 '장애'로 보고 치료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보험사는 장애코드를 받은 가입자에게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도록 하는 면책조항을 두고 있습니다. 쉽게 설명하면, '장애는 치료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니, 치료 보험금을 지급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보험사 입장에서는, 수년째 치료보험금을 받아가는 아동들이 '치료보험금을 줄 필요 없는 장애'라는 것만 확인한다면 상당 규모의 보험금을 아낄 수 있게 되겠죠.

◆ "의료자문 거치면 결국 보험금 부지급"

발달지연 아동들을 대상으로 한 의료자문은 꽤 오랜 기간 논란이 돼왔습니다. '장애를 숨기고 보험금으로 치료를 받는 아동들이 있다'는 보험사의 주장과 '치료를 받을수록 아이는 효과를 본다'는 가입자들의 주장이 팽팽히 맞섭니다. 결국 의료자문은 '장애냐 아니냐'를 판별하는, 사실상 'F코드' 발급을 위한 하나의 장치로 전락했다고 가입자들은 토로합니다.

때문에 어린이보험 가입자들 사이에선 "의료자문에 절대 동의하면 안 된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입니다. 보험사와 제휴된 병원에서 보험사의 의견에 반하는 진단이 나올리 없다는 이유에섭니다. 실제 어린이보험 가입자인 B씨의 아동은 서울대병원과 세브란스병원에서 각각 발달지연(R코드) 진단을 받았으나, 이 진단서도 보험사에는 효력이 없었습니다. 서류만으로 이뤄진 보험사의 의료자문에서 B씨의 아이는 'F코드'를 받게 됩니다. B씨는 해당 보험사에 F코드를 부여한 자문의에 대해 문의했지만, 보안상의 이유로 공개할 수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습니다.

금융감독원과 보험협회는 보험사가 보험금 지급 심사 업무를 공정하고 투명하게 처리하도록 '의료자문 표준내부통제기준안'을 마련했습니다. 제3조(일반원칙) 3항에 따르면 보험회사는 의료자문 결과만을 근거로 보험금 지급을 거절하거나 지연하여서는 아니되며, 보험계약자 등이 제출한 의료기록 등을 바탕으로 공정하게 보험금 지급 심사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의료자문을 거친 가입자들의 사례를 살펴보면, 기준안과는 상반되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담당의사의 소견이나 진단서가 있어도, 보험사들은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의료자문을 통해서만 보험금 지급 여부를 결정합니다. 위 A씨와 B씨의 사례처럼 대학병원의 소견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보험사의 의료자문 결과만을 이유로 보험금 지급을 보류하는 사례가 상당한 것이 현실입니다. 의료자문이 보험금 지급 중단을 위한 도구로 쓰인다는 가입자들의 설명이 그저 의혹으로만은 보기 힘든 이유입니다.



◆ 서류만으로 아동에게 '장애코드' 부여

보험금 지급 심사의 공정성을 따지기 위해 의료자문을 거치는 시스템 자체에는 문제가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보험사 입장에서 봤을 때 과도한 보험금 지급이 이뤄지고 있다고 판단하면 제3의 기관에 공정한 심사를 맡기는 것도 당연합니다. 보험사 역시 수익성을 높여야 하는 '민간기업'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보험사기에 대한 우려 역시 높아지면서, '보험금은 꼭 필요한, 선량한 가입자에게 돌아가야 한다'는게 보험사들의 설명입니다.

그렇다면, 발달지연으로 치료를 받는 아동들은 '선량한 가입자'가 아닐까요. 최근 언어치료를 받는 아동들을 대상으로만 의료자문이 집중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 보험사들이 자체 제휴한 의료기관을 통해서만 의료자문이 이뤄진다는 점, 발달지연을 겪고 있는 아동들을 대상으로 장애여부를 판별하는 자문이 서류로 이뤄진다는 점에 대해선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특히 미취학 아동들의 발달 문제는 아동별로 편차가 크고 치료에 따른 효과도 천차만별이라 의료계에서조차 명확한 해답을 내리지 못 한 난제로 남아있죠. 가뜩이나 저출산으로 인구가 소멸되고 있는 국가에서 발달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동들이 치료기간이 길어진다는 이유로 모두 장애코드(F)를 받는다면 이 나라의 미래는 없을 겁니다.

물론 보험사도 마음이 편치만은 않을 겁니다. 대다수의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가 발달지연일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 했듯, 보험사도 언어치료를 필요로 하는 가입자들이 이렇게 급증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 했기 때문입니다. 실제 지난 2022년 5대 손해보험사에 청구된 발달지연 실손보험금은 1,465억 원, 지난해의 경우엔 상반기 기준으로만 1,700억 원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환경 변화와 여러 요인들로 인해 발달지연 아동의 수는 앞으로 더 증가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전망하고 있습니다.

◆ 정부 개입 불가피…사각지대 개선해야

발달지연 아동의 문제는 결국 단순 민원이 아닌 정부가 해결해야 할 사회적 문제입니다. 앞서 보험사가 발달 치료사의 자격을 놓고 문제 삼으면서 치료사의 국가자격화 문제도 논란이 된 바 있습니다. 결국 발달지연 가정 단체와 국회가 나서 보험사의 보험금 지급을 촉구했고, 현재는 강훈식 의원이 발달재활서비스 제공인력을 국가자격화하는 '장애인복지법 일부개정법률안'과 발달재활서비스 제공인력이 발달지연아동·발달장애아동을 치료할 수 있도록 하는 '장애아동 복지지원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하면서 치료 사각지대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습니다.

결국 필요한 것은 발달지연 아동에 대한 국가의 주도적 치료, 복지체계입니다. 월평균 200만~300만 원에 달하는 치료비를 수년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는 가정은 몇이나 될까요. 보험사들조차 민간기업이 이 공백을 모두 채울 수 없다고 토로합니다. 치료가 필요하지만 가입한 보험으로도 도움을 받을 수 없다면, 정답은 근본적인 의료체계 개선과 국가적 지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보험사와 다투고 있는 수많은 발달지연 가정의 아동들은 치료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습니다. 정상적으로 자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발달지연뿐만 아니라 실제 장애로 등록된 아동들조차 치료에 대한 국가 지원은 턱없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하루빨리 이 공백을 채우지 않으면, 수십만명에 달하는 발달지연 아동 가정은 결국 보험사가 만든 '예비 보험사기범'으로 전락하게 될 전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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