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최저임금 수준을 놓고 본격 심의전의 막이 올랐습니다.
최저임금법에 따라 고용노동부 장관은 오는 31일까지 최저임금위원회에 내년도 최저임금 심의를 요청해야 하는데요.
마감일을 이틀 앞둔 지난 29일 최임위에 최저임금 심의 요청서가 접수됐습니다.
이처럼 이제야 심의 절차가 첫 발을 뗐을 뿐인데, 벌써부터 최저임금 논의는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모습입니다.
내년 최저임금 심의의 주요 관전 포인트는 '사상 첫 1만 원 돌파 여부'였는데요.
그런데 올해는 매년 경영계와 노동계간 논쟁의 중심에 있었던 '업종별 차등적용' 의제가 화두로 먼저 등장했습니다.
● 한은, '돌봄업종 최저임금 차등적용' 제안…논의 테이블 오르나
도화선은 한국은행의 보고서였습니다.
한국은행은 이달초 '돌봄서비스 인력난 및 비용 부담 완화 방안' 보고서에서 고령화 속 돌봄서비스 인력난 해소를 위해 외국인 노동자를 활용하고, 돌봄 업종에 대한 최저임금을 낮추는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육아와 간병 등 돌봄서비스에 인력난이 심각한데다, 비용부담도 커 외국인력 도입이 시급하지만 최저임금을 줄 경우 가계에 큰 부담이 돼 실효성이 낮아질 것이라는 판단인 겁니다.
지난해 간병인 고용 비용은 월 370만 원으로 고령가구(65세 이상) 중위소득의 1.7배, 간병비를 주로 부담하는 자녀 세대인 40~50대 중위소득의 60%를 웃돌 정도로 비용 부담이 큽니다.
육아 도우미 비용 월 264만원 역시 중위소득의 50%를 상회하죠.
한은은 돌봄서비스에 대한 비용 부담을 낮추는 방식으로 우선 개별가구가 사적 계약 방식으로 외국인을 직접 고용해 최저임금보다 낮은 임금을 주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현행법상 '가사 근로자'가 사업자와 고용계약을 체결하면 근로자는 '근로기준법'과 '최저임금법'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가정이 직접 외국인 가사 근로자와 '개인 대 개인'으로 계약하면 근로관례 법령의 적용 대상에서 빠져 '근로자'가 아닌 '자영업자'에 가까운 형태가 되기 때문에 최저임금 적용을 받지 않고 급여를 정할 수 있게 되는 거죠.
한은은 또 외국인 고용허가제 대상 업종에 돌봄서비스업을 포함하고 돌봄서비스 업종 전체에 대해 최저임금을 낮게 설정하는 방식도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이를 두고 시민단체와 노동계가 "이미 심각한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에 시달리고 있는 돌봄 노동자들의 현실을 외면하고 돌봄 노동을 저생산 노동으로 낙인찍어 노동의 가치를 훼손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는데요.
외국인에게 최저임금 이하 급여를 주기 위해 내국인의 가사 근로자의 최저임금도 낮추자는 것이 한은의 주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국제노동기구(ILO) 가입국인데, ILO 협약상 내국인과 외국인의 임금을 차별 적용할 수 없습니다.
ILO 규약은 각종 자유무역협정(FTA)과 연계돼있기 때문에 만약 이를 어길 경우, 통상 갈등으로까지 번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외국인 근로자에게만 별도의 최저임금을 적용하는 것은 불가능 하기에 전체 업종에 대해 최저임금을 차등적용해 외국인력 도입의 실효성을 높이자는 것이 한은의 제안인 겁니다.
업종별 최저임금 차등 적용의 경우 현재 최저임금법에 "사업의 종류별로 구분하여 정할 수 있다"고 돼 있어 법적으론 가능합니다.
다만 업종별 구분은 최저임금위원회 심의를 거쳐 정하게 돼 있는데, 차등 적용을 요구하는 경영계(사용자위원)와 반대하는 노동계(근로자위원)의 의견차가 커 합의가 쉽지 않은 상황이죠.
그렇다 보니 최저임금을 업종별로 차등해 적용한 것은 제도 도입 첫해인 1988년뿐이었습니다.
최저임금 구분 적용 자체에 대한 노동계와 경영계간 합의가 어려운 데다, 외국인력을 염두에 두었다고 해도 돌봄 업종 전체의 최저임금을 낮추는 것은 내국인 돌봄 인력의 처우를 더 열악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돌봄 업종의 최저임금 차등 적용' 의제가 내년 최저임금 심의 테이블에 오르더라도 통과까지는 험로가 예상되는 이유입니다.
● '캐스팅보트' 공익위원 교체는 '변수'…미묘한 변화기류?
다만 변수는 있습니다. 최저임금 논의에서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는 공익위원들이 모두 교체되기 때문입니다.
현재 당연직인 고용부 국장급 위원을 제외한 8명의 12대 공익위원들은 문재인 정부 당시인 2021년 5월 14일에 위촉돼 오는 5월 13일에 임기가 끝납니다.
최저임금법상 연임도 가능하지만, 문재인 정부 당시 임명된 위원들이기에 교체될 가능성도 높습니다.
지금까지 사용자위원들이 '업종별 최저임금 차등 적용' 도입 필요성을 제기해도 캐스팅보트를 쥔 공익위원들이 노동계의 손을 들어 주면서 매번 부결됐는데요.
그러나 이번엔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관측도 조심스럽게 나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대선 공약으로 차등적용을 지지한 가운데, 고용부 장관 제청에 대통령이 위촉하는 공익위원들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는 거죠.
또 저출생·고령화가 국가 존폐까지 위협하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면서 최임위 안팎에서도 "지난해엔 편의점업, 택시운송업, 음식·숙박업 등 자영업자 위주로 업종별 차등이 논의됐지만 이번에 나온 돌봄서비스업은 지금까지 와는 다른 '새로운 영역'"이라는 얘기가 흘러 나오고 있습니다.
저출생 극복의 최우선 과제로 '돌봄서비스 확대'가 꼽히고 있고, 급격한 고령화에 따른 간병비 부담도 만만치 않은 상황인 만큼 최소한 '돌봄노동자 최저임금 차등적용' 의제가 테이블에 올라올 가능성은 높아졌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거죠.
실제 홍콩의 경우 1990년대 들어 가사근로자 임금이 일반 여성 근로자의 30~40% 수준으로 줄면서 수요가 늘었고, 내국인 여성의 고용이 증가했는데요.
외국인 가사근로자 제도가 정착된 싱가포르와 대만의 시간당 외국인 가사근로자 임금이 각각 1,700원, 2,500원 수준으로 우리나라의 올해 최저임금(9,860원)보다 현저히 낮다는 점에서 최저임금 차등 적용은 충분히 논의될 수 있는 사안이 된 셈입니다.
이정식 고용부 장관도 최근 기자들과 만나 한은의 '돌봄노동자 최저임금 차등 적용' 제안이 업종별 구분 적용에 대한 논란을 불러온 것에 대해 "저출생 문제를 위해서 많은 이들이 고민해 하나의 설루션으로 제시한 것"이라고 해석했는데요.
그러면서 이 장관은 "최저임금위원회의 의사 결정 기준과 원칙, 방식 등 여러 가지를 감안해서 위원회에서 수용성 높은 결론을 낼 것"이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다만 노동계의 반대 목소리가 큰 데다 공익위원들 교체 시기 등을 감안할 때, 돌봄 업종 차등 적용 논의가 시작되더라도 일정상 올해는 결론내기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새 공익위원들은 5월 17일경 임명장을 받고 활동을 시작하기 때문에 5월에는 현장 목소리를 듣는 시간을 갖고 6월 중순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심의에 돌입할 수 있습니다.
이와 함께 돌봄서비스 업종 전체의 임금 수준이 낮아질 경우, 내국인 인력이 기존 노동시장에서 밀려날 가능성이 큰 만큼, 내국인 근로자 보호를 위한 안전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또다른 논의도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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