힉스 입자의 존재를 예측한 영국 이론 물리학자 피터 힉스 에든버러대 명예교수가 8일(현지시간) 9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에든버러대는 9일 성명에서 "힉스 교수가 짧게 질환을 앓고 나서 지난 8일 자택에서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힉스 교수는 1964년 힉스 보존(boson·기본입자)의 존재를 예측했다.
힉스 입자는 우주 탄생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한 가설 중 가장 유력한 표준 모형(Standard Model)을 설명하기 위해 정의된 입자다.
이 표준 모형에 따르면 우주 만물은 6개씩의 쿼크·렙톤, 4개의 매개입자(전자기력, 약한 핵력, 강한 핵력, 만유인력) 등 12개 소립자로 구성된다.
이 모든 소립자에 질량을 부여하는 입자가 존재해야 표준 모형이 성립한다. 이것이 힉스 입자다.
힉스 교수가 이런 메커니즘을 제시한 이후 반세기 가까이 지나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 과학자들의 실험을 통해 힉스 입자의 존재가 2013년 학술적으로 공식 확인됐다.
이 입자는 발견이나 측정이 극도로 어려워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리언 레더먼이 저서에서 힉스 입자를 '빌어먹을(Goddamn) 입자'로 불렀다가 출판사의 권유로 '신(God)의 입자'로 바꾸면서 이것이 별칭으로 굳어졌다.
이론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가 동료 과학자와 내기하면서 힉스 입자가 없다는 쪽에 돈을 걸었다가 100달러를 잃었다는 일화도 있다. 호킹 박사는 나중에 힉스 입자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힉스 교수가 노벨상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CERN의 아틀라스와 CMS 실험팀 과학자 수천 명이 힉스 입자 존재를 확인하는 데 매달렸다. 137억년 전 빅뱅을 재현하기 위해 둘레 27㎞의 강입자가속기(LHC) 터널에서 입자를 충돌시키는 실험이 진행됐다.
힉스 입자의 존재가 확인된 당시 83세였던 힉스 교수는 CERN의 발표 후 "내 평생 이것(증명)이 일어나기를 기대하지 못했다. 가끔은 옳다는 건 참 좋은 일"이라며 눈물을 훔쳤다고 영국 BBC, 스카이뉴스는 전했다.
힉스 교수는 2013년 힉스 입자 존재를 예측한 공로로 벨기에의 프랑수아 앙글레르 브뤼셀 자유대 명예교수와 함께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29년 잉글랜드 북서부 뉴캐슬에서 태어난 그는 킹스 칼리지 런던(KCL)에서 물리학을 전공하고 에든버러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은 이후 주로 에든버러대에서 연구했다.
겸손하고 수줍은 성격이었던 그는 1999년 작위를 거절한 적이 있다고 이후 털어놓았다. 2013년에는 작위는 부여되지 않는 명예 훈작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으로부터 받았다.
그는 힉스 입자에 자신의 이름 '힉스'만 붙은 것도 다른 학자들의 공로가 무시된다는 생각에 불편하게 여겼다고 한다.
앙글레르 교수를 비롯해 그와 비슷한 시기에 다른 물리학자들도 이 입자에 대한 가설을 제시했는데, 그런데도 이 입자에 힉스 교수의 이름이 붙은 것은 한국 출신 미국 물리학자 이휘소(벤자민 리) 박사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이 박사가 학계에서 '힉스 입자'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고 1972년 '힉스 입자에 미치는 강력(강한 핵력)의 영향'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피터 매티슨 에든버러대 부총장은 "힉스는 훌륭한 사람이었고 비전과 상상력으로 이 세상에 대한 지식을 확장해준 재능있는 과학자였다"며 "그의 선구자적 작업이 과학자 수천 명에게 동기를 부여했고 그의 유산은 향후 여러 세대에게 영감을 불어넣을 것"이라고 기렸다.
아틀라스 실험을 이끌었던 파비올라 자노티 CERN 소장은 "그는 단순하고도 심오한 방식으로 원리를 설명해 전 세계 물리학자들에게 영감을 줬다"며 "CERN의 역사와 업적에서 중요한 부분이 그와 연결돼 있다. 그가 너무나 그리울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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