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보' 인물화 만들 것"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지나치게 극사실적인 초상화는 거부감을 사기 쉽습니다. 그럴 거면 사진을 걸지, 왜 그림을 걸겠냐는 거죠. 초상화에는 사진으로 드러나지 않는, 사람의 손만이 만들어 내는 손맛이란 게 있습니다."
초상화로 이름난 이원희(61) 계명대 교수의 말이다.
이 교수가 초상화 작업을 해 온 지 약 30년이 됐다. 매년 10~20점을 소화하는 그가 지금껏 그린 초상화만 500여 점이다.
지난달 14일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 로비에 걸린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초상화도 그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화제를 모았다.
초상화 제막식에 참석했던 이 교수는 10일 연합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특별한 곳에 제 작품이 걸리게 돼 대단한 영예"라고 말했다.
"유엔 사무총장 초상화는 그 출신국 미술의 국격을 보여주는 것이어서 작업하는 내내 부담감과 책임감이 컸어요. 반응이 좋아서 뿌듯했습니다. 한 유엔 직원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면서 ཀྵ년간 근무했는데 최고(의 초상화)'라고 말해주더라고요."
이 교수가 반 총장 초상을 그리게 된 것은 지난해 1월 오준 당시 주(駐)유엔 대사가 현대화랑에 초상 화가를 추천해 달라고 요청하면서다.
3개월 뒤 뉴욕에서 반 총장과 대면한 이 교수는 7개월 작업 끝에 파란 유엔기를 배경으로 지구본에 손을 살짝 얹은 초상을 완성했다.
그는 "반 총장이 '초상화를 위해서는 교감을 통해 화가의 마음에 저장되는 부분이 있어야 한다'는 제 이야기를 듣고선 일정에 동행하게 해줬다"고 전했다.
서양화를 전공한 이 교수는 1989년 대기업 부회장의 초상화를 우연히 그렸다가 호평을 받으면서 초상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당시 전업 작가였던 그는 경제적인 요인도 작용했음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이후 박근혜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 김재순·이만섭·김수한·박관용·김원기·임채정 전 국회의장, 이용훈·윤관 전 대법원장 등 인사들의 얼굴이 그의 화폭에 담겼다.
이 교수는 자신의 초상화에 대해 "정확성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인간적인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들 한다"면서 "손맛이란 게 더해져야 하는 만큼 손끝에서 나오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건네받은 사진 한 장으로 작업하기보다는, 피사체를 직접 촬영하고 대화를 나누는 걸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초상화를 그릴 때도 카메라의 청와대 반입이 불가하다는 이야기에 반드시 한 번 뵙고 대화라도 나눠야겠다고 고집했다.
그는 "돌아가신 분에게 실례되는 표현이지만 천진난만한 성격에 핑크빛의 동안이셨던 모습이 기억난다"면서 "대통령과의 대화가 아닌 동네 아저씨와의 대화로 느껴질 정도로 소탈한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초상화는 급히 그리는 바람에 제대로 담지 못한 것 같아 따로 내놓지 않고 있다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정치색이 있느냐는 물음에 잠깐 머뭇대던 그는 "보릿고개를 겪었던 전후 세대는 기본적으로 보수"라면서 "특정한 정치색이 있는 보수라고 생각하진 않는다"는 답을 내놓았다.
대통령과 국회의장, 대법원장의 초상까지 그린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모델은 누구일까.
"1990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제가 초상을 그리는 분이 있어요. 올해 일흔아홉의 사업가인데 제가 가장 어려웠을 때 도와주셨죠. 그분의 초상 열 점에서는 제 그림의 변천사가 보여요. 1990년만 해도 제가 의욕이 컸지 실력이 덜 붙었을 때인데, 지금은 많이 정교해졌어요."
그는 혹시 초상을 그리고 싶은 인물이 있느냐는 물음에 대뜸 "'만인보'를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만인보'는 고은 시인의 인물 시집으로, 5천600여 명의 삶을 다룬 대작이다.
"인생 후반기에 접어든 만큼 제 나름대로 방향을 설정했어요. '만인보'처럼 유명인사부터 필부필녀까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다양한 얼굴을 담고 싶다는 생각에 자료를 수집 중입니다."
aira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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