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채우려 하지 않고 필요한 곳에 나눠줄 줄 아는 나눔의 철학"
(순창=연합뉴스) 백도인 기자 = '주변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디딜방아 옆에 볏가마를 쌓아놓고 마음껏 쌀을 찧어 가져가도록 한 나눔 정신. 개똥을 모아 농사지어 일군 재산을 아낌없이 독립운동과 후진 양성, 빈민 구휼에 내놓은 시대적 양심'
이는 전북 순창 양사보(楊思輔·1378~1447) 종가의 16대손 양석승(楊錫升·1849~1928)의 이야기로, 이 가문이 왜 한국을 대표하는 명가가 됐는지를 응축해 보여주는 장면이다.
양사보는 고려 말 직제학을 지낸 아버지 양수생(楊首生)의 유복자로, 어린 나이에 어머니 이씨의 품에 안겨 개성에서 전북 남원으로 내려왔다. 조부는 대제학을 지낸 양이시(楊以時)로,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대과에 합격해 높은 벼슬을 지냈을 만큼 명문가다.
양사보 종가가 지금의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에 자리 잡게 된 것은 조부와 부친이 한 해 사이에 갑작스레 세상을 뜨면서다.
어머니 이씨는 어린 양사보를 품에 안고 개성에서 천리 길을 걸어 남편이 살던 남원으로 향했다. 이후 왜구의 침략으로 살기가 어렵자 인근 순창으로 피신해 현재의 종택(宗宅·종가가 대대로 살아온 집)에 터를 잡고 양사보를 길렀다.
어머니는 양사보가 어린 시절 학업을 게을리하고 사냥에만 몰두하자 사흘간 단식을 하며 이를 꾸짖었고, 양사보는 그날로 사냥 도구를 불태우고 학문에 전념해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이후 벼슬길에 나가 함평 현감 등을 지내며 집안을 일으켰다.
양사보 집안이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8대손인 양여균(楊汝筠·1584∼?) 때이다. 양여균은 48세 되던 1636년 오랑캐에 의해 한양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고 쌀 3백석을 군량으로 마련해 하인 등 3백여명을 거느리고 한양으로 향했다.
도중에 굴욕적 강화가 맺어졌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군량미를 조정에 헌납한 뒤 귀향했다. 이를 고귀하게 여긴 조정에서 통정대부 호조참의라는 벼슬을 내렸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꿋꿋한 선비정신은 그의 아들 운거(雲擧·1613∼1672)로 이어졌다. 양운거는 물려받은 재산을 더욱 불려 나라에서 제일 가는 부호를 뜻하는 '소봉'이라는 칭호를 들었을 정도로 많은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이를 자신의 호의호식에 쓰는 대신 나라와 굶주린 백성을 위해 아낌없이 내놓았다.
그의 선행은 '현종실록'에도 올라 "운거는 일찍이 미곡 수백 석을 관에 내놓았고 흉년에는 사재를 털어 굶주린 백성에게 나눠줘 그의 덕으로 살아남은 사람이 아주 많다"고 적혀 있다.
그 역시 조정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관직을 위해 곡식을 내놓은 것이 아니다'며 사양했다고 전해진다.
전통을 이어간 이가 '디딜방아'의 주인공 양석승 선생이다.
양석승은 밤낮으로 열심히 일해 생산한 곡식과 삼베, 무명베, 명주 등을 전국적으로 유통하는 데 눈을 뜨며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동네 고샅길이나 논두렁을 가다 개똥이 있으면 보는 대로 주워다 밭의 거름으로 써 '개똥 참봉'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로 억척스러웠다.
그러나 그렇게 모은 재산을 어려운 이웃과 독립운동, 후진 양성에 고스란히 바쳤다.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이었다.
소작료를 거의 받지 않거나 탕감해줬고, 적성강 변 넓은 평야의 논과 남원·순창 일대의 땅들을 소작인에게 과감히 내주기까지 했다.
백범 김구 선생과 기미 독립만세운동 때 33인 가운데 한 분이었던 위창 오세창 선생 등이 주도했던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도 흔쾌히 거금을 내놓았다. 그 징표로 받은 백범의 편지와 위창의 붓글씨가 지금도 전해 내려온다.
선생은 후진 양성에도 힘써 일제의 침탈이 본격화하자 사랑채에 서원을 세우고 한학자이자 우국지사인 설진영 선생을 초빙해 청년들에게 유학을 가르치게 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는 일념에서였다.
그의 후손들은 "지나치게 욕심을 내지 않고 어느 한도에 이르렀다 여기면 재물 모으기를 중지하고 재산을 나눠줘 지나침을 경계했던 어른"이라며 "더 채우려 하지 않고 지나침을 알아 필요한 곳에 나눠 줄 줄 아는 나눔의 철학을 깨달은 분이었다"고 설명했다.
양석승의 아우 석우(楊錫愚·1852∼1913)도 형 못지않았다.
그는 일제가 순창 적성강 가에 있는 공유지를 강제로 빼앗으려 하자 그 많은 전답을 모두 사들인 뒤 주민들에게 나눠줬다.
삶의 터전을 한꺼번에 빼앗길 뻔했던 백성들은 그 덕에 가족과 함께 목숨을 연명할 수 있게 됐고 이후 비를 세워 그의 공덕을 기렸다.
양사보 가문의 32대손으로 향토사학자인 양상화 선생은 "내 욕심만 채우려 하지 않고 이웃에게 끊임없이 베풀며 높은 도덕성을 유지하려 애써 온 선비정신이 수백 년간 명문 종가를 지켜온 비결이 아니겠냐"고 말했다.
doin100@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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