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의 리더십] 국난에 '붓 대신 칼', 의암 류인석

입력 2017-01-17 07:07   수정 2017-01-17 09:31

[나눔의 리더십] 국난에 '붓 대신 칼', 의암 류인석

대학자·의병장으로 국권회복 등불…실천하는 지식인

(춘천=연합뉴스) 박영서 기자 = "한결같은 마음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대대로 피맺힌 원수 왜적을 이겨 없애야 합니다…인석은 다만 죽음을 무릅쓰고 영원히 의병의 깃발을 굳게 잡을 뿐입니다."

의암(毅庵) 류인석(柳麟錫·1842∼1915)의 순국 100주년 기념 어록비에 새겨진 글이다.




구한 말 대학자로서 학생을 가르치던 류인석은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키자 붓 대신 칼을 잡고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

의병 3천여 명을 지휘하는 의병장이 된 의암은 국내외 곳곳을 누비며 일본군과 일본 앞잡이가 된 친일 관료들을 처단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선생은 일본군과 친일 관군의 반격에 일부 전투에서 패하기도 했으나 중국 요동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산과 들을 누비며 목숨을 걸고 구국 투쟁을 전개했다.

원영환 의암학회이사장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친 지도자"라고 평가했다.




◇ 인격과 학식 갖춘 '진정한 지식인'

강원 춘천시 남면 가정리 우계에서 태어난 의암은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효도하고, 열심히 공부했다. 옳은 일엔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그렇지 않은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지 않았다.

선생은 18세에 과거를 보러 갔다가 과거장 입구에 여섯 살짜리 어린아이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아이를 데리고 가 음식을 사 먹였고, 아이가 고아인 것을 알고는 그 길로 과거시험도 포기하고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19세에는 마을 사람 소가 그의 논에 들어가 벼를 뜯어 먹자 아무 말 없이 천천히 소를 끌어다가 시원한 곳에 매어뒀다. 소 주인이 미안하고 두려운 마음에 날이 저물 때까지 소를 끌어가지 못하자 의암은 하인을 시켜 소에게 풀을 먹여서 주인에게 끌어다 줬다.

어느 날은 깊은 밤 뜰 앞 배나무에 올라가 배를 훔치려는 도둑이 있었다. 선생은 도둑이 놀라 나무에서 떨어질까 염려해 소리 지르지 않고 주인이 자지 않는다는 인기척을 내어 도둑이 다치지 않고 도망가도록 했다.

이런 일화들은 선생이 얼마나 높은 인격과 학식을 갖춘 선비였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인정 많고 넓은 아량과 용기를 지닌 그는 매사에 남보다 앞서 실천하는 지식인 그 자체였다는 평가이다.




◇ 54세에 의병대장 취임…'신출귀몰' 위대한 장군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내리자 의암은 제자들과 친한 사람들에게 대처방안으로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제시했다.

'의병을 일으켜 나라 원수를 소탕하거나, 해외로 망명해 선비로서 전통문화를 지키거나, 자결해 목숨을 나라에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54세 나이에 호좌의병대장에 취임하며 문인에서 무인으로 변신한 그는 의병대장이 된 지 하루 만에 일본 첩자를 찾아내 처형했다.

이후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동시에 보는 신통력을 가진 위대한 장군'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전국에서 의병 3천여 명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는 의병을 이끌고 영월과 충북 제천, 청풍, 단양 등을 점령하며 친일 지방관들을 처형했다.

친일 관료들이 백성들에게 빼앗아 관아에 쌓은 곡식과 재물은 의병들에게 나눠줬다.




이후 그는 러시아로 망명할 때까지 황해도와 평안도를 중심으로 존화양이와 위정척사 사상을 민족정신으로 승화하는 강회 활동과 향약 운동을 하며 국권 회복을 위해 힘썼다.

교통이 불편했던 그 시절에도 류인석이 연설하면 수백 명에서 1천여 명이 운집할 정도로 대학자이자 의병장으로서 면모를 과시했다.

선생은 평생 주창하고 실천한 애국애족 이념과 학문, 사상 체계를 집대성하기 위해 1915년 망명지인 중국 서간도 관전현 방취구(芳翠溝)에서 최후 저술인 '도모편'을 저술하다 74세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전파한 나라 사랑 정신이 어디까지 스며들었는지는 백범 김구의 고유문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백범은 1946년 8월 17일 류인석의 묘소를 찾아 무릎을 꿇고 "고국에 돌아와 선생의 옛 고향을 찾으니 감회가 어찌 새롭지 아니하오리까, 향불을 피우며 무한한 심사를 하소연하오니 영령께서는 앞길을 가르쳐 주소서"라고 했다.

나라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쳐 달라는 고유문을 읊은 김구가 류인석을 얼마나 존경하고 사모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목숨을 걸고 지켜낸 대한민국은 그를 기리고 선양하고자 사당을 지어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묘역을 정화해 유적지로 만들고 문화재로 지정했다.

2001년 창립된 의암학회는 류인석의 학문과 사상, 항일 투쟁사를 연구해 학술회를 개최하고 책을 펴내는 등 선양사업을 벌이고 있다.

원영환 의암학회이사장은 "의병 해산 뒤에도 평생 일관되게 끝까지 싸웠던 분은 류인석 선생이 유일하다"며 "그의 족적, 정신, 항일투쟁은 독립운동으로까지 흘러들어 갔고, 우리는 지금도 그의 삶과 정신을 깊이 새겨야 한다"고 말했다.






conanys@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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