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년 여수수산시장에서 일한 70대 할머니 "통장이라도 찾았으면"
국과수 현장감식 도우려고 화재현장 찾은 상인들 '낙담'
(여수=연합뉴스) 박철홍 기자 = "견딜 수 있겠죠. 견뎌봅시다! 우리는 한목숨·운명공동체입니다. 끝까지 손잡고 버텨야 합니다."
전날 시장 역사상 최초 화재로 삶의 터전이 잿더미가 된 여수수산시장 상인들은 16일 시장 앞 여객터미널 주차장에 마련된 천막 안에서 상인대표의 말을 들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화재원인을 밝히는 현장감식이 끝나면 하루아침에 제모습을 알아보기 힘든 흉측한 현장으로 변한 삶의 터전을 상인들은 다시 찾았다.
잿더미가 된 시장으로 들어가 피해 정도를 파악하기 위해 밤잠을 설치고 다시 모인 상인들은 온종일 지루한 기다림을 이어가다 점심을 한 숟가락 떴다.
'솥밥, 김치, 어묵국' 이곳저곳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봉사단체들이 마련한 조촐한 점심을 국에 밥 말아 겨우 목으로 넘긴 상인들은 전기 복구공사가 한창인 시장 쪽을 바라보며 서로를 다독였다.
상인들 사이에서는 여수수산시장이 처음 터를 잡고 개장하던 50여년 전부터 이곳에 새벽마다 나와 생선을 손질하던 홍복득(75) 할머니도 있었다.
21살 꽃다운 나이부터 시장에서 생선을 손질하며, 남편도 없이 5남매를 키워온 홍 할머니는 5남매를 시집·장가보내고 손자들이 다시 시집·장가갈 때까지 54년 동안 시장을 지켰다.
화재 발생일인 지난 15일 새벽 평소처럼 생선을 살피려고 시장에 나온 홍 할머니는 시장 앞 도로를 빼곡히 매운 소방차와 시장 내부에서 피어오르는 시커먼 연기를 보고 뒤로 나앉을뻔했다.
이웃 상인들에게 급하게 화재 사실을 알린 홍 할머니는 50여 년 동안 단 한 번의 화재피해가 없었던 시장을 하루아침에 잃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시장 안에 놓아둔 통장이라도 찾아보려고 다시 시장을 나온 홍 할머니에게 따뜻한 차 한 잔을 쥐여준, 이웃 상인은 "시장에서 평생을 사신 분이라 죽기 전에는 시장을 못 떠나실 양반이다"며 "명절 대목이나 끝나고 불이 나지 그랬나…"고 허망한 마음에 애꿎은 생선꾸러미만 만지작거렸다.
여수수산시장은 매달 하루만 쉬며 50여 년을 장수한 시장이었다.
50여 년 시장 역사 이래 정기휴일 빼고는 문을 닫아본 적 없는 시장이 화재로 문 닫게 되자 "언제 다시 문 여나"라는 한탄과 원망이 상인들 사이에 한숨과 함께 흘러나왔다.
간접피해를 본 상인들은 전기가 끊겨 상해버렸을지 모를 생선을 살피기 위해 전기가 복구되자마자 냉장고 전원을 켜고 물품들을 정리하기도 했다.
이날 오전 국립과학수사원 감식반이 도착해 화재현장에서 현장감식에 돌입하자 몇몇 상인들은 감식을 돕기 위해 함께 화재현장에 들어가 보기도 했다.
천장이 녹아내려, 쌓아 놓은 생선을 덮은 현장을 힘이 풀린 다리를 이끌고 둘러본 상인들은 감식반원에게 전기 시설의 위치를 하나하나 설명해주었다.
화재현장을 둘러보던 상인 일부는 분진을 뒤집어쓴 마른 멸치와 새우 등을 손으로 뒤적거리며 한참을 자리를 뜨지 못했다.
다시 시장을 살려보려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여수수산시장 상인들은 삼삼오오 모여 '칼, 도마, 바구니, 저울' 등 화재로 잃어버린 삶의 도구의 목록을 하나하나 작성하며 재기를 꿈꿨다.
pch80@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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