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고전번역원 '통색촬요' 첫 번역본 출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연산군 때의 간신으로 알려진 유자광(1439∼1512), 안평대군과 석봉 한호에 버금가는 명필이었던 양사언(1517∼1584), 정조 때의 대표적인 실학자 박제가(1750∼1805).
각기 다른 시기에 살았던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양반이 첩으로부터 얻은 자식인 '서얼'이라는 것이다.
양인(良人) 첩의 자손인 서(庶)와 천인(賤人) 첩의 자손인 얼(孼)을 합친 말인 서얼은 조선의 엄격한 신분제를 상징하는 집단이다. 이들은 소설 '홍길동전'의 주인공 홍길동처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고, 상속과 제사에서도 본처가 낳은 형제와는 심한 차별을 받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서얼의 발목을 잡은 것은 과거 응시를 금지한 '서얼금고법'이었다. 서얼 출신의 개국공신 정도전과 권력을 놓고 다퉜던 태종은 1415년 "서얼 자손은 높고 중요한 직위에 등용하지 말라"고 명했고, 인조 3년(1625)까지 서얼의 과거 응시를 허락하는 '허통'(許通)은 조정에서 한 차례도 논의되지 않았다.
한국고전번역원이 16일 처음으로 번역해 출간한 '통색촬요'(通塞撮要)는 서얼의 차별대우 폐지에 관한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유일본이 있으며, 1804년 완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작자는 정조 때의 서얼 학자들로 판단되나,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통색촬요'는 모두 4권으로 구성된다. 도입부인 제1권은 조선 초기부터 숙종 때까지의 서얼 정책을 소개하고, 제2권은 영조 때의 허통 정책을 정리했다. 제3권과 제4권은 정조 때의 서얼 관련 논의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이 책이 영조와 정조 연간에 많은 분량을 할애한 이유는 이 시기에 서얼의 중앙 정계 진출이 두드러졌기 때문이다.
영조보다 약 100년 앞서 즉위한 인조는 "양첩 소생은 손자부터, 천첩 소생은 증손부터 과거 응시를 허용한다"는 조항을 신설했으나, 서얼이 차지할 수 있는 벼슬에는 한계가 있었다.
서얼들은 무수리 출신인 숙빈 최씨가 낳은 영조가 왕권을 잡자 허통에 대한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정치적 입지가 불안정했던 영조는 재위 48년째인 1772년에야 서얼에게 관직을 대거 개방했고, 적자와 서자를 구분하는 폐단을 혁파할 것을 지시했다.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는 노론 중심의 문벌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서얼을 등용했다. 박제가를 비롯해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등은 모두 서얼이었으나, 규장각에서 서적 편찬과 교정을 맡는 검서관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 서얼에 대한 차별은 다시 심해졌고, 노론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세도정치를 이어갔다.
'통색촬요'는 국왕의 비서기관인 승정원이 펴낸 '승정원일기'와 조선 선비들의 개인 문집에서 발췌한 내용을 재구성한 것이라 읽기 쉽지는 않다. 그러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번역 과정에서 각주를 많이 달고, 고어체를 지양했다.
김성우 대구한의대 역사학과 교수는 책의 앞쪽에 실린 해제에서 "조선시대에 서얼은 해바라기의 곁가지 같은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이었다"며 "통색촬요는 서얼을 사랑했던 영조와 정조의 치적을 그들의 시각에서 정리한 책"이라고 평했다.
박헌순·남지만·하현주 옮김. 464쪽.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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