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합병 찬성 의결 전말…의사결정 절차 무시·수치 조작도
(서울=연합뉴스) 전성훈 기자 = 550조원대 기금을 운용하는 세계 3대 기관투자자 가운데 하나인 국민연금공단의 가장 큰 원칙은 '독립성'이다.
사실상 2천만 대한민국 국민의 '노후 자산 관리인' 역할을 수행해야 하므로 언제나 수익성을 가장 큰 가치로 둬야 하고 어떤 다른 목적을 위해 운용돼서는 안 된다.
국민연금기금운용지침을 보면 수익성, 안전성, 공공성, 유동성, 운용 독립성 등 5대 원칙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원칙은 2015년 7월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을 찬성하는 과정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내부 의사 결정 시스템을 무시한 것은 물론 잘못된 결정을 정당화하고자 자료 조작도 서슴지 않은 것으로 박영수 특별검사팀 수사 결과 드러났다.
16일 사정당국에 따르면 2015년 5월 제일모직-삼성물산 간 1대 0.35의 비율로 합병 계약이 체결되자 시장에서는 계약의 불공정성과 그 의도를 두고 논란이 일었다.
당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비롯한 그룹 총수 일가는 제일모직 주식 42.19%를 보유한 반면에 삼성물산 주식은 1.41%에 불과했다. 삼성물산은 그룹 핵심계열사인 삼성전자 주식 4.06%를 보유한 상황이었다.
제일모직 주식 합병가액에 대한 삼성물산 주식의 합병가액 비율이 낮게 산정될수록 총수 일가의 법인 주식 소유 비율이 높아짐과 동시에 삼성전자에 대한 지배력이 강화되는 구조였다.
이런 가운데 삼성물산 주식 7.12%를 가진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크게 불리하다'며 합병 반대 입장을 공식화하자 시장의 눈은 국민연금으로 쏠렸다.
국민연금은 삼성물산 주식 11.21%를 보유한 최대주주로 사실상 '캐스팅보트'를 쥘 수 있는 입장이었다.
시장의 목소리는 분명했다.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사인 ISS는 적정 합병 비율이 1(제일모직)대 0.95(삼성물산)이라며 합병 반대를 권고했다.
한국거래소 등 국내 자본시장 유관기관들이 참여한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은 물론 제일모직이 자문을 의뢰한 회계법인도 합병 비율이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냈다.
국민연금 내부에서도 계약 체결된 비율로 합병될 경우 국민연금에 손해가 난다고 분석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의 한마디는 시장 목소리를 모조리 잠재웠다.
박 대통령은 같은 해 6월 안종범(58·구속기소) 경제수석 등을 통해 "합병이 성사될 수 있도록 잘 챙겨보라"는 지시를 문형표(61·구속기소)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전달했고 문 장관은 이를 그대로 이행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국민연금 의사결정 시스템은 무력화됐다.
처음엔 원칙대로 외부인들로 구성된 '전문위원회'에 상정하는 쪽에 무게가 실렸다.
하지만 외부위원들의 성향을 분석한 결과, 100% 찬성 의결이 어렵다는 판단이 선 문 장관은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내부 직원들로만 구성된 투자위원회가 의결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 합병 찬성을 이끌어냈다. 그해 7월 10일의 일이다.
불과 한 달 전 구조상 동일한 사안인 SK C&C와 SK 간 합병 안건에 대해 전문위원회 심의를 거친 사례는 무시됐다.
국민연금은 이를 정당화하고자 적정 합병 비율을 인위적으로 낮추는 것은 물론 합병으로 인한 시너지효과를 과대 포장하는 등 수치를 조작하는 범행도 마다치 않았다.
전문위원회 일부 위원들이 강하게 반발했으나 이미 결정된 일을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과적으로 국민연금은 천문학적인 손실을 본 반면에 삼성은 3년째 와병 중인 이건희 그룹 회장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으로의 경영권 승계 작업이 한결 순탄해졌다.
국민연금이 그동안 철칙같이 지켜온 내부 원칙을 깡그리 무시하며 가입 국민의 이익이 아닌, 삼성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 셈이다.
이러한 과정을 주도한 문 장관은 작년 11월 30일 국회 청문회에 출석해 "국민연금 합병 과정을 전혀 보고받지 않았다"며 태연하게 거짓 증언을 했다.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및 위증 혐의로 이날 문 장관을 구속기소했다.
또 합병 과정에 박 대통령의 도움을 받는 대가로 '비선 실세' 최순실(61·구속기소)씨에게 430억원대 자금을 지원한 혐의(뇌물공여 등)로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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