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무역갈등도 한국에 악영향 가능성
(서울=연합뉴스) 고은지 기자 =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일자리를 빼앗는 협정(Job Killing Deal)이다."
한미 FTA에 대한 공격의 날을 세우며 전면 재협상까지 시사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20일)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다.
정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국가 간 합의에 따라 맺은 협상을 일방적으로 무효로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자국우선주의·반(反) 자유무역주의를 주창하는 트럼프 정부가 출범하면 어떤 식으로든 통상정책에 변화가 생길 수밖에 없다.
특히 정권 초기에는 자신의 지지기반을 공고히 다지기 위해 선거 기간 공약했던 중국에 대한 제재,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탈퇴,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협상 등에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면서 우리나라도 영향권 안에 들 수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중국과 함께 한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할 가능성이 제기되는 점도 우리 무역에는 부담으로 작용한다.
우리나라 수출이 2년 연속 하락세를 면치 못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무역장벽을 더 높게 쌓는다면 가뜩이나 느려진 우리 경제의 성장 속도에도 제동이 걸릴 수 밖에 없다.
◇ 트럼프, 한국에 개방확대 요구할 듯
트럼프 행정부의 통상 기조는 보호무역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
사실 보호무역주의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최근 몇 년간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의 공세가 거세지면서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서는 보수·진보 정권을 막론하고 자국산업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가 다양하게 이뤄져 왔다.
18일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2015년 연간 전 세계 수입규제 조사개시 건수는 277건에 달했다.
이 가운데 반덤핑 230건, 상계관세 30건, 긴급수입제한(세이프가드) 17건으로 집계됐다.
특히 미국의 반덤핑 조사개시 건수는 42건으로 전년 19건의 두 배가 넘었다.
반덤핑 의혹을 가장 많이 받은 나라는 중국이다. 2015년 조사 건수가 전년의 63건보다 8건 많은 71건이었다.
우리나라에 대한 규제 건수는 13건으로 중국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자유무역에 부정적인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면 통상압력은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다.
트럼프 당선인이 통상협상을 맡을 '국가무역위원회'(NTC)의 위원장으로 강경 보호무역론자인 피터 나바로를 임명한 것도 이런 예측에 힘을 싣는다.
산업연구원은 '미 대선 이후 예상되는 경제정책 변화의 영향과 우리의 대응방안' 보고서에서 "트럼프 정부는 불공정 무역행위 제재 강화, 미국 지식재산권 보호 강화, 환율조작에 대한 강력한 대응 등 미국의 통상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강력한 무역정책을 추진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한국산 수출품에도 수입규제 조사가 증가하고 고율의 반덤핑 관세가 부과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했다.
TPP, NAFTA, 한미 FTA 등 기존 통상 구도에도 변화가 불가피하다.
트럼프 당선인은 폐기까지 거론하고 나섰지만,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할 때 TPP 비준 보류, NAFTA와 한미 FTA 재협상 쪽에 무게가 실린다.
산업연구원은 "보호무역주의 강화 조치의 하나로 한미 FTA 재협상을 강력하게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다만 "한미 FTA 완전 철폐와 한국산 수출에 대한 관세 부과로 회귀하기보다는 기존 양허안의 관세 철폐 기한을 연장하거나 법률서비스처럼 미국의 시각에서 우리의 이행이 불충분하다고 여겨지는 분야에 대한 개방 확대를 요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제현정 무역협회 통상협력실 차장은 "한미 FTA 협정 이행을 강조하면서 필요할 경우 압력의 강도를 높일 것"이라며 "법률시장 개방처럼 이행에 대한 시각차가 있는 경우 갈등이 발생할 여지가 있다"고 내다봤다.
◇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질라
트럼프 정부의 우선 타깃은 우리나라보다는 중국이다.
트럼프 당선인은 지난 14일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미국 기업들은 중국기업과 경쟁할 수 없다. 왜냐하면, 달러 가치는 강세일 수밖에 없고 그것이 우리를 죽이고 있기 때문"이라며 중국과의 무역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유지했다.
미국이 중국산 제품에 대해 제재 강도를 높일 경우 우리가 반사이익을 볼 수 있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반덤핑과 상계관세 세율이 높게 산정되는 원칙을 새롭게 적용한다면 중국뿐 아니라 한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가 무차별적으로 영향을 받게 된다.
섬유산업처럼 중국을 통한 우회수출이 주를 이루는 업종 역시 타격이 불가피하다.
실제로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우리나라를 대상으로 개시된 수입규제 조사 21건 가운데 9건은 한국과 중국을 동시에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제 차장은 "최근 중국산 제품을 대상으로 이뤄진 미국의 수입규제 조치에 한국도 자유롭지 못한 모양새"라며 "중국과 가격경쟁 관계에 있는 기업이나 중국에 진출해 미국으로 수출하는 기업은 악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미·중 간 무역갈등이 격화된다면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듯 지난해 하반기 들어 조금씩 회복세를 타기 시작한 우리 수출이 다시 꺾일 수 있는 만큼 우리 정부는 트럼프 행정부가 조만간 내놓을 통상정책을 주시하며 대비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지난 17일 국무회의에서 "트럼프 정부의 출범에 따라 제기될 수 있는 통상 등 각종 현안에 대해서는 다양한 상황별 대응방안을 선제로 준비해서 상호 간에 충분한 협의가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해달라"고 당부했다.
우리 정부는 한미 FTA가 미국에도 상당한 혜택을 줬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알리고 있다.
산업부는 지난 12일 서울에서 열린 한미 FTA 제4차 공동위원회에서 "한미 FTA가 상호호혜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고 미국 역시 공감했다"고 전했다.
미국 측 수석 대표로 참석한 미국 무역대표부(USTR) 마이클 비만 대표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임명된 인물이지만, 새 행정부에서도 유임할 예정이어서 이날 회의는 사실상 새 대표부와의 상견례 자리 성격이었다.
산업부 고위 관계자는 "이날 한미 FTA 재협상 등에 관한 이야기는 오가지 않았다"며 "새 정부 출범 후에도 큰 문제 없이 지속해서 공동위가 개최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유일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6일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미국 상무부 장관 내정자가 상당히 보호무역주의적인 사람이고 미국무역대표부(USTR)도 마찬가지여서 산업부가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유 부총리는 "국경세를 부과한다면 어려운 부분이 되겠지만 사회간접자본(SOC) 사업 등에 진출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eun@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