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청, 항명하는 몰타기사단에 "조사에 순응하라"
(로마=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 몰타 기사단이 미얀마에서 콘돔을 배포한 책임을 물어 조직 고위 관계자를 해임한 사건을 둘러싼 교황청과 몰타 기사단의 갈등이 점입가경이다.
교황청은 17일 성명을 내고 미얀마 콘돔 사건과 관련한 고위 관계자를 해임한 사건을 놓고 교황청의 조사를 거부하고 있는 몰타 기사단의 시도를 받아들일 수 없음을 분명히 했다.
교황청은 이날 성명에서 이번 일을 "몰타 기사단의 중앙 지휘 체계의 위기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몰타 기사단을 압박했다.
교황청은 이어 "논란을 조사하기 위해 임명된 독립 위원회를 다시 한번 신임한다"며 "민감한 단계에서 사건과 관계된 모든 사람들의 협조를 기대한다"고 강조했다.
교황청은 몰타 기사단이 미얀마에서 인공 피임을 금하는 가톨릭 교리에 어긋나는 것으로 인식되는 콘돔을 미얀마 빈민에게 배포한 책임을 물어 작년 12월 초 알브레히트 폰 뵈젤라거 부단장을 해임한 것의 적절성을 파악하기 위해 교황의 승인 아래 조사단을 꾸렸으나, 몰타 기사단은 교황청이 주권을 훼손한다고 반발하며 조사에 협조하지 않고 있다.
로버트 매튜 페스팅 몰타 기사단장은 폰 뵈젤라거 부단장 해임 당시 교황청의 뜻이라며 사퇴를 종용했으나 폰 뵈젤라거 부단장은 해임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교황청에 사건을 보고했다.
이에 교황청이 폰 뵈젤라거 부단장의 해임에 관여한 적이 없다며 특별 조사 위원회를 꾸려 이 사건에 대해 들여다볼 것을 명령하자 페스팅 단장은 조사에 응하지 않으며 교황의 권위에 도전했다.
앞서 페스팅 단장은 지난 14일 몰타 기사단 고위 관계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황청 조사 위원회 위원들의 신뢰성을 문제삼으며 "교황이 임명한 위원회는 이 문제를 객관적으로 풀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교황청은 그러나 이날 성명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위원회의 보고서가 나오면 이를 검토한 뒤 몰타 기사단뿐 아니라 가톨릭 교회 전체를 위해 도움이 되는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말하며 더 이상의 항명은 용납할 수 없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드러냈다.
한편, 표면적으로는 콘돔 배포와 연관된 해임을 둘러싼 갈등으로 비춰지는 이번 사건에는 개혁을 강조하는 교황과 이에 불만을 품은 가톨릭 보수 세력의 갈등이 내재돼 있다는 분석이다.
몰타 기사단은 본래 가톨릭 교단의 전통과 서열을 중시하기로 유명하며, 특히 가톨릭 내에서도 대표적인 보수파인 미국 출신 레이먼드 버크 추기경이 몰타 기사단의 사제로 임명되고부터는 개혁 성향의 교황과 갈등을 키워왔다.
금욕과 절제에 기반한 전통적인 성윤리와 전통적인 가족 가치를 중시하는 가톨릭 보수파들은 교조적인 도덕 우선주의보다는 자비에 기초해 개개인이 처한 상황을 판단할 것을 보다 강조하는 교황과 충돌을 빚고 있다.
11세기 십자군 원정 당시 예루살렘 성지와 순례객들에게 의료 봉사를 제공하던 조직에 기원을 두고 있는 몰타 기사단은 교황에 순응을 서약한 가톨릭 평신도 단체이자, 통치권을 행사하는 영토는 없으나 교황청을 포함해 세계 106개국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는 주권 국가라는 독특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회원은 약 1만2천 명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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