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석의 동행] 대한민국 국민의 자긍심

입력 2017-01-20 12:00  

[최재석의 동행] 대한민국 국민의 자긍심

(서울=연합뉴스) 20일(현지시간) 8년 임기를 마치고 박수 속에 백악관을 떠나는 미국 대통령을 또다시 본다. 그 어느 때보다 부럽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달 10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그의 '정치적 고향'인 시카고에서 한 고별연설은 쉽게 잊히지 않는 명장면이다. 연설장을 찾은 한 중년 여성은 "오바마 대통령이 언젠가는 시카고로 다시 돌아와 우리의 평범한 이웃으로, 우리 곁에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우린 언제쯤 이런 대통령을 이웃으로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까.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심판 결정을 앞둔 상황을 생각하면 가슴만 답답할 뿐이다. 이런 나라의 국민으로서 말 그대로 자괴감이 들 수 있다.


딱 거기까지만 했으면 좋겠다. 우리는 작금의 정치 상황 때문에 과도하게 자기비하하고 냉소적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모두가 괜스레 의기소침하고 몸과 마음이 움츠러들지 않았나 싶어 안타깝기까지 하다. 연초에 10년 만에 유럽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경험을 나누고 싶다. 유럽에서 국제선 비행기를 탔을 때다. 내 앞자리에 앉은 금발의 젊은 서양 여성이 태블릿PC로 한국 드라마를 보는 모습을 목격하고 적잖이 놀랐다. 한 케이블방송사가 2013년 방영한 '이웃집 꽃미남'이라는 청춘드라마였다. 이 여성은 영어 자막이 깔린 드라마 화면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착륙 준비를 위해 태블릿PC를 꺼달라는 승무원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화면을 덮었다.



한국의 문화콘텐츠가 아시아를 넘어 세계 시장에서 인정받는 현장을 직접 보니 가슴이 뿌듯했다. 내가 만든 드라마는 아니지만,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랬다. 그 기분은 외국에서 느끼는 알량한 애국심만은 아니었다. 문화계의 '블랙리스트' 존재 여부가 사법당국의 수사대상이 된 나라. 대통령이 대기업 회장을 안가로 불러 영화와 방송 사업이 '좌 편향'됐다고 불만을 표하고, 그 대기업이 '국제시장' 같은 애국주의 성향의 영화를 만들었다는 의혹이 불거진 나라. 그런 나라이지만 그 국민이 만든 문화콘텐츠는 세계인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었다. 대한국민 국민으로서 긍지를 느낄만하지 않는가.



이뿐만이 아니다. 유럽의 기차나 지하철에서 본 젊은이들도 우리처럼 대부분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들이 쥔 휴대전화를 유심히 봤다. 'SAMSUNG'이라는 로고가 선명했다. 그 로고가 유독 내 눈에 잘 띄었는지 모른다. 자연스럽게 어깨가 우쭐해졌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가까운 한 아르헨티나 식당에 들어갔을 때의 일이다. 왁자지껄하게 술을 마시던 손님 중 한 명이 우리 일행을 보고 "안녕하세요"라고 한국말로 인사했다. 그가 보기에 한국 사람들처럼 보였나 보다. 나는 반갑게 웃었다. 서양인이 동양인을 보면 대충 일본 사람이나 중국 사람으로 여기던 시절은 이제 옛날이구나 싶었다. 10년 만에 유럽서 느끼는 한국의 위상은 확연히 달랐다.







세계는 한국인을 인정하는데 우린 너무 스스로 책망만 하지 않는가. '헬 조선'이라고 한다. 행복을 빼앗기고 희망을 잃은 젊은이들의 아픔을 상징하는 말로 이해한다. 암담한 미래를 생각하면 그런 말을 쓸 수 있다. 청년 세대의 좌절과 상실감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런 감정이 들게 한 기성세대의 책임을 회피할 마음도 없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우리는 자기비하하는 데 익숙하다는 생각을 쉽게 떨치지 못한다. 일찍부터 겸손을 미덕으로 배워온 한국인은 자기 평가에 너무 박하다. 한국은 세계가 놀랄만한 수많은 성과와 실적을 이미 내고 있다. 한국인의 힘이다. 우린 충분히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질 자격이 있다. 다만 스스로 이를 인정하는데 인색할 뿐이다.



'최순실 게이트'로 나라 전체가 몇 개월째 앓는 홍역이 어찌 국민의 책임이겠는가. 우매한 위정자들 탓이다. 그들이 국민의 신뢰를 저버렸지, 국민이 그들을 배신하지는 않았다. 특정 후보를 찍은 '내 손가락' 탓이라고 자책하는 사람들이 더는 없었으면 한다. 살기 어려울수록 더 이웃을 살피는 천성을 가진 우리 국민이다. 작년 한 해 그렇게 경제가 어렵다고 해도 연말연시 불우한 이웃을 돕는 사랑의 열기는 되레 더 뜨겁다. 19일 사랑의 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21일부터 시작된 이웃돕기 모금 실적을 나타내는 '사랑의 온도탑'이 벌써 97.9도(3천511억 원)까지 올랐다. 작년 같은 시기에는 93.9도였다고 한다. 이달 31일까지 목표액을 무난히 달성해 온도 탑이 100도를 훌쩍 넘을 것 같다.



누구나 분노와 상실의 시대라고 한다. 희망이 있어야 당장의 고통도 참겠지만, 장래도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아서일 것이다. 그렇다고 자책만 하진 말자. 가끔은 세계가 우리 국민의 능력과 성취를 인정하고 있다는 걸 생각하자. <논설위원>

bondo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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