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2월 1일…이사업계 호황·쓰레기 처리 비상
(제주=연합뉴스) 변지철 기자 = 저는 신(神)들의 고향 제주에서 두 눈 부릅뜨고 대문을 지키는 '문전신'입니다.
집으로 들락거리는 잡귀나 부정을 막아주는 가정의 수호신이지요.
제주를 왜 '신들의 고향'이라고 부르느냐고요?
제주에는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관장하는 수많은 토속신이 있는데 그 수가 무려 1만8천에 이를 정도로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주를 '신들의 고향' '신들의 나라'라고 부르곤 하죠.
그런데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저를 포함한 신들 모두가 지난 한 해 동안 있었던 일을 천지개벽의 신 천지왕(옥황상제)께 보고하러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다.
산과 바다, 마을, 가정 등 제주 곳곳에서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신들이 임무교대를 위해 하늘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예부터 제주 사람들은 이 틈을 타 이사를 하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이색적인 이사풍경이 벌어지곤 합니다.
바로 신구간(新舊間)이라고 하죠. 신구세관교승기간'(新舊歲官交承期間)의 줄임말이고, 여기서 관(官)은 바로 저와 같은 신을 뜻합니다.
사람들은 평소 가구 하나를 옮기거나 집안 수리를 하려고 해도 가정을 지키는 여러 신의 노여움을 살까 두려워 함부로 행동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신구간에는 지상을 감시하는 모든 신이 하늘로 올라가기 때문에 이사하거나 수리를 해도 동티(신의 성냄으로 인한 재앙)가 나지 않는다는 믿음에서 이 기간에 집중적으로 이사하는 풍습이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지고 있습니다.
보통 24절기의 하나인 대한(大寒) 이후 5일째(양력 1월 25일)부터 입춘(立春) 전 3일(〃 2월 1일)까지를 신구간이라고 합니다.
이 일주일 남짓한 짧은 기간 수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이사를 하는 모습은 저희가 하늘에서 봐도 참 재미있습니다.
이사를 나가는 사람은 짐만 챙겨 대충 정리만 한 뒤 얼른 사라지고, 새로 들어오는 사람은 소금이나 팥을 뿌려 잡귀를 쫓고 집을 깨끗이 정리하고 나서 살림을 시작합니다.
특별히 좋은 날을 잡아 먼저 솥과 불, 쌀, 요강을 순서대로 들이고 나중에 가족은 물론 친척과 친구들을 모두 동원해 나머지 이삿짐을 한꺼번에 옮기기도 하죠.
짧은 기간 이사가 한꺼번에 몰리다 보니 제주의 수많은 이삿짐센터나 개인 용달차 예약이 꽉 차는 등 관련 업계가 특수를 누리기도 했습니다.
신구간 때만 되면 평상시 요금보다 2∼3배나 비싼 웃돈을 요구하는 '바가지'가 기승을 부리기도 하고, 가구나 가전제품을 바꾸는 가정이 많아 대리점마다 신구간을 겨냥한 할인판매 경쟁도 치열하게 벌어집니다.
이 때문에 신구간이 끝날 때쯤에는 동네 곳곳에 쓰다 버린 물건들이 넘쳐나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차! 요즘 제주에서는 요일별 배출제 때문에 쓰레기를 마음대로 버리지도 못한다고 하는데, 특별히 이번 신구간에는 행정에 신고만 한다면 이사를 하는 가정에 한해 요일에 상관없이 쓰레기를 분리배출 할 수 있도록 탄력적으로 운영한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해가 갈수록 신구간에 이사하는 가구가 줄어들면서 이런 이사철 진풍경은 점차 사라지고 있습니다.
공동주택이 늘어나고 풍습에 구애받지 않는 신세대가 증가하면서 신구간과 상관없이 자신이 편리한 때에 이사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신구간에 맞춰 사용승인을 받으려는 공동주택 수가 많았지만, 요즘에는 그다지 몰리는 일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한때 1만 가구에 달하던 이사철 대이동은 이제는 그 수를 예측하기조차 힘듭니다.
저와 같은 신들로서는 저희를 점차 냉대하는 것 같아 섭섭한 마음이 들 뿐이죠.
그래도 마을과 집안, 바다, 들판 등 제주 어느 곳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신들이 있다는 사실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 이 기사는 제주 전래 이사철 '신구간'을 맞아 한국민속신앙사전 등을 참고해서 유래와 역사 등을 일인칭 이야기 전개 형식으로 소개한 기사입니다.>
bjc@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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