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권 교수 "발굴 20년 맞은 풍납토성은 백제사 비밀 품은 공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온조가 세운 백제 도읍의 위치는 오랫동안 밝혀지지 않은 역사학의 화두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천안 위례성을 비롯해 하남 춘궁동, 몽촌토성, 풍납토성 등이 그 후보지로 거론됐다.
그러다 1980년대 올림픽공원 안에 있는 몽촌토성에서 수많은 백제 토기가 발굴되면서 이곳에 백제 한성도읍기(기원전 18년∼475년)의 도성이 있었다는 견해가 힘을 얻게 됐다.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은 금세 사그라졌다. 1997년 몽촌토성에서 불과 700m 정도 떨어진 풍납토성의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도 다량의 백제 토기가 출토됐기 때문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그해 본격적인 풍납토성 발굴조사에 돌입해 지난해까지 유물 수십만 점과 다양한 건물터를 찾아냈다.
풍납토성 발굴 20주년을 맞은 지금,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풍납토성이 백제 한성도읍기의 수도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가 거의 없다.
풍납토성 발굴 초기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로 조사작업에 참여했던 신희권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는 22일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풍납토성을 주제로 한 2차 논쟁이 벌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풍납토성이 백제 한성도읍기의 도성이었는지가 1차 논쟁의 주제였다면, 2차 논쟁에서는 풍납토성의 축조시기를 놓고 치열한 격돌이 펼쳐질 것이라고 말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1999년 풍납토성의 동쪽 성벽 중앙부를 조사한 뒤 기원전에 축성을 시작해 3세기 중후반 성이 완성됐다고 발표했으나, 2011년에는 동쪽 성벽의 다른 지점을 발굴한 결과 3세기 중후반 착공해 5세기 중반까지 증축됐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신 교수는 "풍납토성을 처음 쌓은 시점이 기원전이었는가를 규명하는 것이 관건"이라면서 "이는 고대사의 뜨거운 감자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고고학계 일부에서는 기원 전후부터 300년까지의 시기를 고대국가의 기틀이 잡히지 않은 원삼국시대로 규정한다"며 "규모가 큰 풍납토성이 기원전부터 존재했고 3세기까지 증축을 거듭했다면 이미 1세기나 2세기에도 고대국가의 징후가 나타났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풍납토성의 축조시기를 밝히는 일은 삼국사기에 있는 초기 삼국시대 기록을 과연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도 연관돼 있다"고 덧붙였다.
풍납토성의 또 다른 과제는 세계유산 등재다. 지난 2015년 백제 후기의 유산인 공주, 부여, 익산의 문화재들은 세계유산이 됐으나, 그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서울의 백제 유산은 세계유산 목록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세계유산 등재를 위해 서울시는 2020년까지 5천억원을 투입해 풍납토성 내 왕궁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중심으로 보상 작업을 진행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신 교수는 "백제시대의 지층은 지하 2∼4m 아래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풍납토성 내부는 지하 2m까지만 개발이 허용돼 유물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라며 "보상이 순조롭게 이뤄진다면 세계유산 등재 가능성이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풍납토성에서 발굴이 완료된 지역은 10∼20%에 불과하다. 작년까지 동쪽 성벽의 해자를 발굴했던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오는 9월부터 남문 추정지를 조사할 계획이다.
발굴할 곳이 많이 남은 풍납토성에 대해 신 교수는 백제사의 비밀을 풀 단서를 품은 곳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풍납토성은 비단 백제뿐만 아니라 한반도 고대국가 형성의 실마리를 알 수 있는 유적입니다. 역사적으로 의미가 매우 크고, 앞으로 어떤 유물이 나올지 기대되는 공간입니다."
psh59@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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