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한국 출판계의 거목이었던 고(故) 박맹호 민음사 회장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는 23일 조문객들의 발길이 이틀째 이어졌다.
서울대 문리대 동기로 만나 평생의 벗으로 지냈던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이날 아침 일찍 빈소를 찾았다.
이 전 장관은 "고인은 '문학의 산타클로스'"라면서 "자기가 이루지 못한 것, 작가가 되려고 했던 꿈을 출판을 통해 남들에게 이뤄준 사람 아니냐"고 말했다.
이 전 장관은 "많은 사람이 고인을 출판인으로 기억하지만, 전 소설을 지망하던 시절부터 사귀었던 사람으로서 애도하러 온 것"이라면서 "사회적으로 성공했음에도 남을 포용할 줄 알고 착하고 삶도 깨끗했던 친구"라고 회고했다.
역시 고인과 오랜 우정을 이어온 고은 시인은 "작은 문예부흥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한국 현대 문학의 성장은 상당 부분 박 회장의 활동 덕분"이라면서 "소설을 썼던 사람이기에 문학적 토양이 풍부했다"고 평가했다.
고은 시인은 또 시인 신동문으로부터 박 회장을 소개받았던 이야기, 신 시인의 모친상 빈소를 박 회장과 함께 찾았다가 시 '문의 마을에 가서'를 썼던 일 등을 회고했다.
1977년 민음사 계간지 '세계의 문학' 초대 편집위원을 맡았던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와 유종호 연세대 전 석좌교수는 함께 앉아 고인의 발자취를 뒤돌아봤다.
민음사에서 첫 평론집 '궁핍한 시대의 시인'(1977)을 출간했던 기억을 떠올린 김 교수는 "책을 내지 않겠다고 버텼는데 박 회장이 유종호 선생과 함께 집까지 찾아와 설득했다"면서 "절 문학의 세계로 인도했으니 은인 중의 은인"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작가가 잘되려면 출판이라는 하부구조가 잘 뒷받침해줘야 한다"면서 "사실 수지타산이 잘 맞아야 하는 것이 사업인데 고인은 그 속에서도 좋은 책을 내야 한다는 걸 잊어버리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유 전 교수는 "무엇보다 기획력이 뛰어났던 분"이라면서 "유신 말기라 잡지 허가가 안 나오는 걸 알고, (국내 문제는 다루지 않겠다는) 일종의 위장술로 '세계의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냈다"고 전했다.
그는 이어 "'삼국지' 연재를 제안한 쪽도 박 회장이었다"면서 "당시 젊은 이문열이 자기 작품을 쓰려고 하지, 삼국지 번역을 안 하려 했으나 박 회장 설득으로 연재를 시작해 결국 베스트셀러가 된 것만 봐도 그 기획력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밖에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과 강맑실 사계절 대표 등이 빈소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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