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압력에 교과서에서 '무신론적' 시·동화 삭제
이슬람 조직 동원력에 여야 정치권도 '영합'
(서울=연합뉴스) 윤동영 기자 = 세속적이던 방글라데시 사회에 이슬람 극단주의 사조가 눈에 띄게 진행되고 있다.
22일 (현지시간)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방글라데시에서 세속주의적인 작가와 지식인 등을 대상으로 한 극단주의 테러 사건이 최근 수년간 빈발하는 가운데 히잡 착용 여성들이 늘어나고 이슬람 법학 등을 가르치는 이슬람 사원 부속 고등교육기관인마드라사의 학생이 증가하고 있다.
특히 지난 1일 배포된 벵골어 표준 교과서에서 그 이전에 실려 있던 17가지 동화와 시가 보수적인 이슬람 종교학자들의 요구로 "무신론적"이라는 이유 때문에 삭제됐다. 철자 'o'를 가르치는 대표 단어로 과거엔 'ol(고구마)'를 내세우던 것이 'orna(신앙심이 깊은 이슬람 소녀들이 사춘기에 이르면 쓰기 시작하는 스카프)로 교체되기도 했다.
일반인들 눈엔 잘 띄지 않는 이런 변화에 방글라데시 지식인들 사이에선 정부가 급진 이슬람을 더 많이 수용하는 조짐이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방글라데시 이슬람 단체들이 교과서 편집에까지 개입할 정도라는 것은, 세속주의를 표방한 집권 여당인 아와미연맹당에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이어서 미국의 우려 역시 커지고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이와 관련, 해리 해리스 미 태평양사령부 사령관은 지난해 8월 일본에서 한 연설에서 방글라데시, 필리핀처럼 이슬람 인구 비중이 큰 역내 국가에서 폭력 사태가 잇따라 발생하거나 그 조짐을 보이는 데 대해 미군이 크게 우려하고 있다고 밝혔다고 당시 미 언론들은 보도했다.
방글라데시는 1971년 파키스탄에서 분리, 독립한 이래 세속주의와 민주주의를 지향해옴에 따라 그동안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확산한 초국가적인 지하디스트(이슬람 성전주의자) 세력이 발붙이지 못했다.
그러나 지난 수년간 무신론적인 블로그 작가와 지식인들에 대한 극단주의자들의 공격이 일상화되고, 세속적인 사상은 방글라데시 공론장에서 빠른 속도로 밀려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는 지적했다.
2013년 대규모 집회를 통해 교과서 개편을 처음 요구했던 거대한 강경 이슬람 조직인 '헤파자트'의 공동 사무총장 무프티 파예즈 울라는 "정부 윗선에 얘기했더니 무슨 말인지 알더라. '이슬람교도가 이런 것을 배워선 안 되죠'라고 "밝혔다. 그는 "그들은 국민의 지지도를 의식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교과서 내용이 달라진 것에 항의하는 시위가 22일 교과서위원회 청사 바깥에서 열렸지만, 제1야당이 방글라데시 국민당도 침묵으로 일관해 "이 문제에 관한 여야 간 완벽한 의견일치가 있는 것 같다"고 한 다카대 국제관계학 교수는 말했다.
'세속적' 방글라데시와 '이슬람' 방글라데시 간 분열은 2013년 마드라사 학생 수만 명이 다카 도심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무신론적인 블로거' 처벌, 조각상 철거, 교과서 개편을 포함한 이슬람 교육 의무화 등을 요구하고 나섬으로써 갑작스럽게 도드라졌다.
마드라스 교과서 개편 운동을 주도하는 전직 이슬람 교육가 시디쿠르 라만은 자신들이 일반 학교 교과서 개편도 목표로 하고 있다며 "거리 일반인들의 믿음과 생각, 태도를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어렵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고 말했다.
방글라데시 교육 당국은 이슬람 측의 요구를 받아들여 마드라사용 영어 교과서에 등장하는 인물의 힌두교나 기독교 혹은 외국식 이름을 모두 무슬림 이름으로 바꾸고, 남학생과 여학생 간 대화 장면, 머리를 드러낸 여학생 그림, 여성 신체의 발달에 관한 설명 중 월경이라는 단어를 뺐다.
헤파자트는 이에 더해 미술 시간에 이슬람 교리에 따라 생물을 그리는 것을 금지하고 서예만 가르치도록 하며, 체육 교과서에서 어리거나 젊은 여성의 신체운동 그림도 넣지 않도록 추진할 방침이다.
"남자아이가 하는 것은 여자아이가 할 수 없다. 나는 나무 타기를 할 수 있지만 내 아내와 여동생은 못한다. (그러니) 여자아이들의 신체운동 그림은 불필요하다"고 이 단체의 한 고위관계자는 말했다.
이 단체의 최종 목표는 5학년 때부터 남녀 학생을 완전히 분리하는 것이다. 한 반에 남녀 학생을 섞어 놓으면 "혼전 성관계를 조장"하는 결과를 빚을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ydy@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