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 최일선 조직' 위상 높아지고 혜택 많아 경쟁 치열
순번제·추대 옛말…후보 난립으로 과열, 후유증 겪기도
(전국종합=연합뉴스) 충북 옥천의 한 마을이 최근 난데없는 선거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임기 2년의 새 이장을 선출하는 선거인데, 남녀 2명이 입후보해 화끈한 공방을 벌였다.
결과는 여성이면서 현직인 A씨 승리로 돌아갔지만, 선거관리위원회가 꾸려지고 공약 대결까지 펼쳐진 치열한 승부였다.
마을 어귀에 선거 현수막이 내걸리고, 후보자 프로필을 담은 벽보가 등장하는 등 얼핏 보면 웬만한 지방선거 못지않은 선거전이 전개됐다.
A씨는 "막상 선거에 나서니 질 수 없다는 오기가 발동했다"며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 벽보를 붙이고 주민들이 모인 곳을 찾아다니며 지지를 호소했다"고 말했다.
농촌 마을 대표인 '이장'(里長)의 위상과 처우가 개선되면서 자리 다툼이 치열해지고 있다.
마을 원로 등이 모여 추대하거나 순번을 정해 돌아가며 맡는 방식은 옛말이 됐고, 마을마다 치열한 선거전이 펼쳐지고 있다.
◇ 높아진 이장 위상…치열해진 선거, 후유증도 심각
충남 서산시 대산읍의 한 마을도 이장 자리를 둘러싼 경쟁이 웬만한 지방의원 선거 못지않다.
지난해 투표에서 A씨가 선출됐지만, 상대인 B씨가 자격문제를 제기해 당선이 취소된 상태다. 이 마을은 전입 후 2년이 지나야 이장에 출마할 수 있는데, A씨의 거주 기간이 1년 10개월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서산시는 A씨 대신 차점자 B씨를 새 이장에 추천하려 했지만, 이 역시 규정에 없어 불발됐다. 다시 선거를 해야 하지만, 갈등이 봉합되지 않아 아직 일정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이 마을은 대산석유화학단지 바로 옆에 있다. 입주업체 등에서 내놓는 후원금이 적지 않아 이장 권한이 다른 곳보다 막강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제주도 서쪽의 작은 섬 비양도에서도 이장 선거 때면 어김없이 불화가 생긴다. 과거 비양도 케이블카 설치를 둘러싸고 마을 여론이 둘로 갈라진 뒤 선거마다 고소·고발이 되풀이되고 있다.
지난해 10월 17일 새 이장을 뽑는 선거도 후보자 비방과 탄원서 제출, 선거관리위원 집단사퇴 등 혼란을 빚으면서 사흘이나 미뤄진 끝에 가까스로 치러졌다.
경북 영양군에서는 이장 선거에 출마한 후보의 사생활이 공개되는 등 낯뜨거운 비방전이 벌어졌고, 경기도 옹진군에서도 이웃 주민 둘이서 서로 이장을 하겠다고 나서 치열한 승부를 펼쳤다.
지난달 부산에서는 친동생의 통장 연임을 반대하는 주민에게 최루가스 분말을 뿌린 50대 남성이 경찰에 입건된 일도 있다
◇ 매달 20만원 수당·혜택도 '짭짤'…일부 부촌 도시선 여전히 '구인난'
이장 자리 경쟁이 치열한 것은 그만큼 권한과 역할이 커졌기 때문이다.
과거 공무원에게 굽신거리며 잔심부름이나 하던 처지에서 벗어나 마을 대표자이면서 행정의 최일선 조직으로 당당히 대우받고 있다. 주민 곁에서 호흡하다 보니 국회의원이나 시장·군수까지 눈치를 보는 경우도 많다. 능력을 발휘하면 지방의회로 진출하는 발판이 되기도 한다.
처우도 좋아져 한 달 20만원의 수당과 200%의 명절 상여금이 나오고, 매달 2차례 열리는 회의에 참석하면 2만원씩 수당도 받는다.
고등학생과 대학생 자녀에게 장학금을 주고, 연수나 직무교육 등 해외여행 기회를 주는 지자체도 많다.
마을 주변 공공사업에 입김을 미치거나 감독할 기회도 생긴다.
옥천군 박범규 자치행정과장은 "이장의 역할이 커지면서 평균 연령이 젊어지고, 법령이나 자치제도 등을 꼼꼼히 공부해 전문성을 갖춘 사람도 늘고 있다"고 설명했다.
도시지역도 예외는 아니다. 일부 신도시를 중심으로 이장 역할을 하는 '통장' 자리 경쟁이 뜨겁다.
미사강변도시가 들어선 경기도 하남시 미사2동의 경우 지난해 4월 통장 7명을 뽑는 면접에 31명이 신청해 4대1의 경쟁률을 보였다.
신축 아파트 단지여서 입주자 권리를 행사하려는 주민이 많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다만 부촌인 성남시 분당구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702명 통장이 있어야 하는 데, 48곳이 공석이다. 지원자가 없어 3년째 통장이 없는 곳도 있다.
성남시 관계자는 "경제력이 높고,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곳이어서 이웃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선뜻 나서는 주민이 드물다"면서 "고급 주택이나 빌라촌일수록 더욱 심하다"고 분석했다.
◇ 32년 장기 집권·부시장 출신 이장도 등장
경쟁이 심화되면서 경남 김해시는 이장·통장의 임기를 최장 4년으로 못 박아 놨다. 장기집권을 막으려는 조처다. 그러나 지원자가 없을 경우는 예외적으로 계속 근무하도록 허용한다.
이 규정을 통해 20∼30년씩 이장을 맡는 사람이 적지 있다. 최장수 이장은 32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해시의회는 규칙 개정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해 당사자인 이장·통장의 눈치를 보느라고 수 개월째 개정안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한 시의원은 "이장·통장 중에는 연임 제한규정 폐지를 요구하는 의견이 많다"며 "연임 제한이 필요하지만, 더 많은 주민이 참여하도록 선출일정 등을 적극 공개하고 홍보해야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고위 공직자 출신 이장도 있다.
경남 거창군 주상면 내오리 오류동 이장 이준화(68)씨는 통영시와 진주시 부시장을 역임한 고위직(2급) 공무원 출신이다.
그는 4년 전 군수 출마의 꿈을 접고 27가구 40명의 주민을 대표하는 이장이 됐다. 당시 가장 나이가 어려 이웃 주민들의 간절한 부탁을 뿌리치지 못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처음에는 후배 공무원이나 동료 이장들이 껄끄럽게 생각했지만, 회의나 교육에 앞장서 참여하는 등 적극적으로 이장 일을 하다 보니 지금은 관계가 좋아졌다"며 "이장도 제대로 하려면 눈코뜰새 없이 바쁜 직업"이라고 평가했다.(지성호 이강일 김인유 손현규 차근호 한종구 변지철 박병기 기자)
bgipark@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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