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들 고향가는데"...설날 천막농성장 지키는 노동자들

입력 2017-01-28 14:18  

"모두들 고향가는데"...설날 천막농성장 지키는 노동자들

창원 S&T중공업·한국산연 노동자들 "자식 노릇 제대로 하고, 땀 흘려 일하고 싶다"

(창원=연합뉴스) 박정헌 김동민 기자 = "설 연휴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명절이 되니 서글픈 마음만 더 커져요. 실감도 나지 않는데 연휴라고 농성 인원이 줄어든 모습을 보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멥니다."





칼바람을 맞으며 거리에서 천막농성을 하느라 식은 떡국 한 그릇도 구경하지 못한 노동자들에게 설은 야속하기만 했다.

남들이 고향을 찾거나 해외여행을 떠날 때 이들은 몇 되지 않는 동료들과 체온을 나누며 천막을 지켰다.

설날인 28일 경남 창원시 S&T저축은행 앞에서 천막농성 중인 황기화(54)씨는 "올 설은 사람 구실 못한다는 생각에 부끄럽기도 하고 죄책감도 든다"고 말했다.

S&T중공업 사측의 임금피크제 도입과 휴업휴가에 맞서 노조가 대로변에 천막을 설치한 뒤 그는 이곳에서 27일째 농성 중이다.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82년 S&T중공업에 입사한 황 씨는 농성 때문에 고향을 못 찾은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번 설에는 대학생인 두 아들만 부모님 댁인 진주로 보냈다"며 "아내는 집에서, 나는 천막에서 설을 보내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다"고 한숨 쉬었다.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하는 것은 명절이라고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거나 오랜만에 고향 친구들을 만나 밥 한 끼 살 돈이 없는 현실이다.

황 씨는 "나이 50이 넘었으면 사회에서 어느 정도 기반을 잡고 연휴에는 친지들이 모인 자리에서 구심점 역할도 해야 하는데 현실은 정반대"라며 "1년 넘게 마이너스 통장을 쓰고 있는 처지라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푸념했다.

매년 설이면 지내던 차례도 올해는 농성을 하느라 건너뛰었다. 대신 함께 농성 중인 동료 7명과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위에서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거나 포장 음식으로 허기를 달랬다.





차례상 준비 등 아들로서 마땅히 해야 할 몫을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도 떨치기 힘들었다.

고향을 찾지 못한 동료들끼리 합동차례를 지내는 것도 잠시 생각해봤으나 변변한 차례상을 차릴 돈도 없고 도로 한가운데 천막에서 차례를 지내는 것도 조상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포기했다.

그는 "빨리 사측과 협상을 마무리해 내년에는 예전처럼 설 연휴가 되면 고향 집을 찾고 싶다"며 "자식 노릇, 삼촌 노릇 제대로 한 번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목소리에 힘을 줬다.

황 씨와 함께 농성 중인 김기신(56)씨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86년 S&T중공업에 입사해 총포를 가공하는 일을 하는 그는 이번 설 고향인 충남 태안군을 찾지 못했다.

어머니께 농성하느라 이번 설에는 보지 못할 것 같다고 전화를 하자 '그놈의 회사는 항상 그렇냐'며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이번 설 연휴는 동료들과 함께 천막에서 보내기로 했다"며 "지금 이 상태로 고향을 가봤자 즐거울 수 없지 않겠느냐"고 하소연했다.

이어 "실은 부모님을 찾아뵙고 조카 세뱃돈도 주면서 설 연휴를 보내고 싶다"며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처지에 무슨 낯으로 연휴라고 고향을 찾겠느냐"고 고개를 숙였다.

추위도 추위지만 천막 위치가 대로변인 탓에 차와 사람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는 그는 주로 함께 농성하는 동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귀향을 못 한 아쉬움을 달랬다.

김 씨는 "서로 회사나 고향 이야기를 하면서 가슴에 진 응어리를 풀었다"며 "빨리 협상이 타결돼 현장에서 웃으며 일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설 연휴에 '천막 파수꾼' 노릇을 하는 건 비단 S&T중공업 노동자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정리해고 철회 문제로 창원시 마산자유무역지역 한국산연 앞에서 5개월 가까이 천막농성 중인 해고자 34명도 대부분 고향을 찾지 못했다.

한국산연 해고자 중 한 명인 구성자(39)씨는 동료들과 비교하면 그나마 조상께 체면치레는 했다.

설날에 고향 집이 있는 하동군을 찾아 아침 가족들과 차례를 지내고 다시 천막이 있는 창원으로 넘어왔기 때문이다.

연휴지만 해고자라는 신분 때문에 고향을 찾지도 못한 채 집에 있거나 농성장에서 시간을 보낸 동료들도 많았다.

부모님 댁을 가서도 해고자라는 신분 때문에 구 씨는 가족들과 화목하게 담소를 나누기는커녕 주변 눈치만 보느라 그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었다.

예년과 같은 설 연휴였다면 아내와 함께 처가도 마음 편히 들르고 조카들에게 용돈도 기분 좋게 건넸을 테지만 최저임금 수준의 실업급여만 받는 처지에 그런 일은 사치로 느껴졌다.

구 씨는 "나를 포함해 해고자 대부분이 집안 가장이라 정리해고 뒤 경제적인 부분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많이 힘들어한다"며 "집에 가져다줄 월급이 없을 때의 절망감은 당해본 사람이 아니면 모를 정도의 큰 고통"이라고 털어놓았다.







이제 12살, 14살이 된 두 아들은 틈만 나면 '아빠 언제 복직하느냐'고 묻는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구 씨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 간다.

그런 그의 유일한 바람은 사측이 하루빨리 복직을 시켜주는 것이다.

구 씨는 "해고자 34명이 빨리 복직해서 노동의 땀방울을 흘렸으면 좋겠다"며 "지금 몸과 마음이 너무 추운데 빨리 겨울이 가고 봄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home1223@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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