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 같은 현실, 버텨내거나 도망치거나

입력 2017-01-31 11:44  

악몽 같은 현실, 버텨내거나 도망치거나

이유 첫 소설집 '커트'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취업준비생 여진은 도서관 열람실에서 잠들었다가 전망 좋은 솔루션 전문업체 N사에 취업하는 꿈을 꾼다. 잠에서 깨보니 N사에서 합격을 통보하는 부재중 전화가 와 있다. 면접도 보지 않은 상태였다.

실제로 이뤄진 꿈은 그러나 곧 악몽이 된다. 엄청난 업무량에 상사의 괴롭힘, '빽' 좋은 후배의 등장까지. 다른 사람들에게도 꿈이 현실로 나타나는 일이 벌어졌고 세상은 온통 아수라장이다. 여진은 매일 꿈에서 살인을 하고 다음날 부고를 확인한다.

작가 이유(48)는 소설집 '커트'(문학과지성사)에서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릿한 세계, 결과적으로 악몽이 계속되는 세계를 상정한다. 북극 근처 도시국가의 건축설계 공모전에 당선되지만 현지에서 동상에 걸려 발가락 세 개를 잘라내고 사업에도 실패한 건축가('지구에서 가장 추운 도시'), 미국 유명대학 진학에 성공해 공간이동 연구를 하지만 어느샌가 돌아와 한국의 뒷골목을 떠도는 왕년의 천재.('깃털') '꿈꾸지 않겠습니다'의 주인공 여진은 결국 이렇게 말한다. "어떤 꿈도 이루어지지 않는 게 이 세상에는 더 좋은 일인 것 같아."

악몽같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까. 맨 마지막에 실린 표제작 '커트'의 미용사는 악몽의 순환고리를 끊어내는 상징적 행위를 보여준다. 머리카락에서 타인의 기억을 꿰뚫는 능력을 지닌 미용사는 머리카락이 아닌 머리를 자른다. 과거 자신의 사수로 성적 괴롭힘을 가한 남자 미용사의 머리통을 분리한다. "그 역시 한동안 어둡고 탁한 기억에 빠져 허우적대는 일은 없을 것이며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때문에 불면의 밤을 보내는 일도 없을 것이다."

미용사의 딸은 엄마의 머리통을 떼어낸다. 아프기는커녕 막혔던 숨이 트인다. 악몽 같은 기억은 언제고 되살아나겠지만 모녀에게 가위는 세상의 갖은 공격을 받아넘기는 무기다. 악몽의 흔적을 잘라내며 버티는 게 미용사 모녀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다.




일종의 도피로서 거리두기라는, 좀더 현실적인 대안도 있다. '낯선 아내'에서 안면인식장애가 생긴 경찰관에게는 몇 년간 함께 일한 동료도, 살인사건의 용의 선상에 오른 아내도 모두 머리모양이나 얼굴 형태로 기억되는 동등한 타인일 뿐이다. '빨간 눈'의 주인공은 자신과 똑같은 복제인간을 주문해 일과 지긋지긋한 자신으로부터 해방을 만끽한다.

작가는 '악몽 같은 현실'이라는 흔한 문제의식을 은유 대신 판타지로 발전시킨다. 꿈과 무의식, 타자에서 발견하는 자아, 기호로 환원되는 인간 등 여러 가지 철학적 고민을 담았다. 2010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해 2015년 장편 '소각의 여왕'으로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한 작가의 첫 소설집. 252쪽. 1만2천원.

dad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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