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이 펼친 '지식경영' 핵심은…"토론과 소통으로 설득하라"

입력 2017-02-01 11:24  

세종이 펼친 '지식경영' 핵심은…"토론과 소통으로 설득하라"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의 지식경영 연구' 출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 세종 6년(1424) 임금과 신하들 사이에서 역사관을 주제로 눈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조선은 이전 왕조인 고려의 역사를 정리한 '고려사'를 집필하고자 했는데, 군신 간에 생각이 크게 달랐다.

세종은 고려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쓰는 직서(直書)를 주장한 반면, 신하들은 조선의 형편에 맞게 고쳐 서술하는 개서(改書)를 고집했다.

문제는 고려가 대외적으로는 중국에 사대하면서도 안으로는 황제국의 체제를 유지한 '외왕내제'(外王內帝) 상태였다는 것이다. 명나라를 섬기던 조선으로서는 이러한 체제를 인정할 수 없었지만, 세종은 역사책에 과거의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종은 곧바로 직서를 지시하는 대신 수년을 기다리며 신하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토론과 소통을 통해 자신이 원하던 책을 완성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1일 출간한 '세종의 지식경영 연구'는 조선시대 최고의 성군으로 불리는 세종이 어떻게 '지식경영'을 펼쳤는지 살펴본 책이다.

세종 리더십에 대해 연구를 해온 정윤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이익주 서울시립대 교수, 박현모 여주대 세종리더십연구소장 등이 쓴 글을 모았다.

세종은 정확하고 풍부한 정보와 지식을 바탕으로 최상의 의사결정을 내리고자 했다. 그는 22개 분야에서 350여 종의 책을 펴냈는데, 일부 책을 간행할 때는 '고려사'처럼 신하들과 의견 충돌이 잦았다.

특히 세종 치세 최고의 업적으로 평가받는 '훈민정음' 창제 과정에서는 사대부들의 극심한 반발에 시달렸다.

세종 26년(1444) 집현전 부제학이었던 최만리는 중국에 대한 사대에 어긋나고, 이미 이두가 존재해 쓸모가 없으며, 중대한 국사가 아니라는 점을 들어 한글 창제를 반대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일찍부터 왕의 잘잘못에 대해 직언하라고 말해 왔던 세종은 이 상소를 접한 뒤 화를 내거나 조목조목 반박하지 않고, 일부 내용에 한해서만 반론을 제기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또 최만리의 상소 이전에 신하들과 벌였던 토론 내용을 근거로 훈민정음 반대론자의 논리가 빈약함을 꼬집고, 문맹 퇴치와 개화를 위해서는 고유의 문자가 필요하다는 주장을 통해 훈민정음 반포에 성공했다.

책에는 이외에도 정치에 귀감이 될 만한 사실을 엮은 '치평요람', 중국이 아닌 조선의 농경 사정에 맞춘 서적인 '농사직설' 편찬 등에 얽힌 세종의 지식경영 사례가 담겼다.

정윤재 교수는 "세종은 평소 신료들에게 직언을 주문하면서 토론과 소통을 통해 주요 정책을 입안하고 국정을 장악했다"며 "세종은 권위주의적인 전제군주라기보다 공화주의적인 주도권을 취했던 권위 있는 군주였다"고 평가했다.

204쪽. 1만4천원.


psh59@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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