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하 사망 30주기…"볼에 뽀뽀하고 나간게 마지막…30년 흘러도 애통"
"연인 떠올려 만든 1집…장르는 크로스오버라고 했죠"
(서울=연합뉴스) 이은정 기자 = 싱어송라이터 고(故) 유재하의 2살 터울 형은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철렁한다.
1987년 10월 31일 오후 5시 30분께, 어둑해질 즈음이었다.
"형 잠시 나갔다 올게. 가수 됐다고 동창이 찾아왔는데 빨리해치우고 올게~."
평소에도 다정다감했던 동생은 수술을 받고서 칩거하던 형의 볼에 뽀뽀하고 문밖을 나섰다. 그 뒷모습이 마지막이었다. 유재하는 이튿날인 11월 1일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단 한 장의 앨범 '사랑하기 때문에'를 낸 지 약 3개월 만이었다.
그렇게 그가 떠난 것이 벌써 30년 전.
"너무 생생하게 기억나죠. 여전히 애통하고요. 가족들은 당시 화장도 못하겠어서 동생을 천주교 용인 공원묘지에 묻었어요. 세월이 흐르고 재하의 목소리가 담긴 앨범 한 장만 남았는데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리마인드를 해요. 재하와의 기억을 통해 힘을 얻고요."
형 유 모(57) 씨는 부친이 아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으로 음반 수익과 성금을 기탁해 설립한 '유재하 음악장학 재단'의 실무를 맡고 있다. 1989년부터 시작된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도 물밑에서 묵묵히 돕고 있다.
유 씨는 3일 전화 인터뷰에서 "30년이 흐르는 동안 동생을 기억하고 조명해준 많은 분에게 감사하다"고 인사했다.
"애통함에 비영리 재단까지 만든 부친이 동생이 떠난 지 2년도 채 안 돼 돌아가셔서 사실 집안이 풍비박산 난 것이나 다름없었어요. 하지만 좋은 평가를 들을 때마다 아흔 살 노모와 가족은 동생이 기특합니다. 죽어서도 착한 아이입니다."
유재하는 3남 3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바로 위에 형이 유 씨였다. 둘은 '쿵 짝'이 잘 맞았다. 서울 삼성교 인근 한옥에 살 때도 둘이서만 사랑채를 썼고, 대학로 양옥집으로 이사했을 때도 함께 2층에 살았다.
유 씨는 "내 바로 위에 형과 14살 차이가 나 둘이 친했다"며 "동생은 순진하고 어수룩한 구석이 있어서 몸이 아픈 내게도 잘 의지하는 귀염둥이였다. 사랑스럽고 늘 걱정스러웠다"고 말했다.
동생과의 살가웠던 시간은 밤을 새워 이야기해도 모자랄 정도라고도 했다.
형과 달리 동생은 애주가였다.
"선친이 약주를 좋아하셨는데 집안 내력인지 제가 동생에게 '술을 366일 먹느냐'고 잔소리를 하곤 했죠. 재하는 싸고 독한 40도짜리 쥬니버 드라이진을 좋아했어요. 전 한잔도 못 하겠던데,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1시간 반이면 700㎜짜리 한 병을 다 비웠죠. 그것도 '스트레이트'로요."
유 씨는 "칵테일처럼 섞어 먹으라고 토닉워터나 주스를 사다 주곤 했다"며 "재하가 세상을 떠나고 유품을 정리하는데 옷장에서 한 병도 따지 않은 채 나오더라. 내가 섭섭할까 봐 '왜 이런 쓸데없는 걸 사오냐'고 하지 않고 '고마워, 형'이라고는 옷장 속에 넣어둔 것이다. 배려하는 마음이 컸다"고 기억했다.
음악적인 재능은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다. 초등학교 때 아코디언과 첼로를 연주했고 5학년 때부터 기타를 붙잡고 살더니 중학생이 되자 형 눈에는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잘 치더라"고 했다. 집안에 음악 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일제강점기에 전국 노래자랑에 나가 2등을 했던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았다.
"사실 전 음악 소양이 부족해서 잘 몰라요. 그런데 어느 날 제가 다니던 경희대 캠퍼스에서 동생을 우연히 만났죠. 음악 하는 친구들을 만나러 왔다길래 따라가 보니 재하보다 나이 많은 학생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돼 있더군요. 그래서 '잘하나 보다' 했어요."
한양대 작곡과 출신인 유재하는 대학생이던 1984년 조용필의 밴드인 '위대한 탄생' 키보드 주자로 활약했다. 1986년 그룹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의 객원 멤버로도 활동했다.
꿈도 가수가 아닌 프로듀서였다. 20대 초반, 그는 30년이 흘러서까지 명곡으로 조명되는 곡들을 만들었다. 형은 '그대 내 품에'는 20~21살, '사랑하기 때문에'는 22~23살, 이문세의 3집 곡인 '그대와 영원히'도 그 언저리에 만든 노래라고 기억했다.
유재하의 대표곡인 '사랑하기 때문에'도 조용필의 7집(1985년), '가리워진 길'도 김현식의 3집(1986년)에 먼저 실렸다. 그러나 다른 자작곡들이 이들 가수의 음악 스타일과 달라 반영되지 않자 그는 직접 불러 발표하기로 했다.
9곡 전곡을 작사·작곡·편곡한 1집은 발매 당시 반응이 시들했다. 클래식 작법이 접목되고 팝과 록이 가미된 사운드, 리듬과 엇박자인 보컬, 바이브레이션 없이 담백한 음색때문에 '음정이 불안정하다', '음악이 어렵다'는 평가를 받았다.
유 씨는 "재하가 송창식 씨처럼 가창력이 뛰어나지도 않고 스스로는 대중성을 고려해 만들었지만 어렵게 들리는 탓에 반응이 별로 없었다"고 말했다.
"제가 재하에게 '장르가 뭐야?'라고 물으니 '음악에 장르가 어딨어. 뭐 굳이 장르를 구분하자면 크로스오버랄까'라고 하더군요. 그런 '장르도 있니?'라고 하자 '나 같은 장르'라며 웃었어요. 음악적인 자존심이 무척 강했죠."
1집의 모든 곡은 당시 교제하던 여자 친구를 떠올려 만든 것으로 알려졌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에겐 약혼식은 안 했지만 양가 집안이 인정하는 음대생 연인이 있었다.
유 씨는 "저한테는 말 안 했지만 아마 (여자 친구를 생각하며 만든 곡들이) 맞을 것"이라며 "그 시절에는 남자들이 여자 친구한테 몰입하는 걸 가족에게 잘 얘기 못 하는 촌스러운 정서가 있었다. 재하가 앨범에 '그대와 영원히'를 넣지 않았는데 아마 콘셉트대로 풀어나갈 때 맞지 않았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이 앨범은 가요사에서 팝 발라드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는 칭송을 받으며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신승훈, 유영석, 김광진, 김동률 등 수많은 뮤지션이 그의 영향을 받아 데뷔하거나 음악 기법에 존경을 표시했다.
지난해 27회까지 열린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에서는 조규찬, 유희열, 김연우, 루시드폴, 스윗소로우 등 300여 명의 걸출한 뮤지션이 배출됐다. 그리고 그에게는 '비운의 천재', '싱어송라이터의 대명사'란 수식어가 붙었다.
안타깝게도 그의 미발표곡은 남아있지 않다.
유 씨는 "동생이 대략 5년간 11곡을 썼다"며 "안타까운 건 뮤지션들이 보통 서른 살이 넘으면 음악에 대한 통찰력이 생겨 좋은 곡들을 많이 쓴다던데 너무 일찍 떠났다. 살아있었더라도 자존심이 강해 완성도에 못 미치면 절대 발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30주기를 추모하는 움직임은 이미 첫발을 뗐다.
매월 열리는 '유재하 30주기 추모 릴레이 동문 음악회 공연'이 지난달부터 시작됐고, 추모 앨범과 유재하 동문회 구성원들이 총출동하는 합동 공연도 준비 중이다.
유 씨는 "뮤지션 등 많은 분에게 인정받은 동생이 대견하고 추모에 동참해주는 분들에게 감사하다"며 "'유재하 음악 경연대회'를 매년 열면서 동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의 나이인 출전자들을 보면 이런 소망을 갖게 된다. 이 대회를 통해 정말 뛰어난 뮤지션들이 많이 나왔으면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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