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철학교수가 대학때 성폭행 피해 공개한 이유는

입력 2017-02-04 14:00  

중년 철학교수가 대학때 성폭행 피해 공개한 이유는

에세이 '파리에서 보낸 한 시간'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1990년 8월 1일 저녁 프랑스 파리 제13구의 한 아파트. 스물두 살 철학도 칼린 L. 프리드먼은 전 남자친구의 지인 로버트 딩지스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전 남친이 잠시 외출한 사이 딩지스는 한 손에 식칼을 든 채 프리드먼을 두 차례 강간했다. 프리드먼은 이튿날 아침 캐나다로 귀국했고 딩지스는 한 달쯤 뒤 검거돼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신간 '파리에서 보낸 한 시간'(내인생의책 펴냄)은 프리드먼의 인생을 뒤바꿔놓은 성폭행 사건, 이후 끔찍한 기억과의 싸움을 기록한 에세이다. 저자는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가 성폭행을 당하는 과정을 세세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묘사한다. 이후 20년 넘게 이어진 후유증 경험담은 독자마저 괴롭게 한다.

성폭행 다음날 캐나다로 가는 공항에서부터 공황발작(panic attack)이 왔다. 눈앞에 강간범이 보였고 흉기가 목을 짓눌렀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호흡이 가빠지고 얼굴은 화끈거렸다. 기억은 수시로 떠올랐고 그때마다 몸에 경련이 일어났다.

호흡곤란·수면장애 같은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의 전형적 증상이 동반됐다. 설상가상 붙잡힌 강간범이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보균자였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나는 여전히 매일같이 그날을 살고 있었던 셈"이라고 저자는 떠올렸다.


저자는 10년 가까이 지나 정신과 전문의와 상담하며 강간당한 사실을 털어놓고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처음엔 가족과 극소수 지인만 알던 비밀을 공개하는 일은 물론 힘들었지만 보람 있었다. 성폭행 피해자를 더욱 괴롭게 하는 건 숨길수록 깊어지는 수치심, 타인에게 비친 자신과 본래 자아 사이의 괴리이기 때문이다. 남자친구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연기할 필요도 없어졌다.

나이 쉰을 바라보는 철학교수가 굳이 20여 년 전 강간범의 재판기록을 뒤적여 과거를 복원한 이유다. 대부분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를 스스로 밝히는 일은 좀처럼 용인되지 않는다. 일부 이슬람 문화권에선 가족의 수치로 여겨 '명예살인'을 자행하는 경우도 있다. 피해자들은 스스로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자책감까지 겹쳐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저자는 강간당한 이야기를 비밀에 부치는 사회에서는 문제의 심각성이 제대로 인지되지 못한다고 말한다. 성폭력은 사회구조가 아닌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고 여성 본인이 몸을 잘 간수하는 수밖에 없다는 통념만 깊어진다는 것이다.

"성폭행 피해자들이 자신이 겪은 일을 드러내 놓고 이야기하게 되면 이를 통해 우리는 강간의 문제점을 사회정의적 차원에서 조명할 수 있게 된다.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생기는 이상 신체 반응에도 내가 굳이 성폭행당한 이야기를 공유하고자 한 것 역시 이런 맥락에서였다."

이민정 옮김. 264쪽. 1만5천원.

dad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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