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시당하거나 손해보곤 못살아" 참지 못하는 한국사회의 자화상

입력 2017-02-09 06:00  

"멸시당하거나 손해보곤 못살아" 참지 못하는 한국사회의 자화상

전문가 "한국인 유독 모멸감 못참아, 멸시 문화 풍토 개선 시급"

(전국종합=연합뉴스) 주부 한모(37)씨는 설 명절 마지막 날인 지난달 31일 친정인 전북 전주의 한 아파트를 찾았다가 봉변을 당했다.

협소한 주차장 탓에 차를 잠시 이중주차했던 한씨는 이날 오후 2시 45분께 한 남성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차를 빼러 나갔다.

한씨가 죄송하다고 사과한 뒤, 차를 옮기려던 찰나 70대로 보이는 차주의 아버지는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었다.

술에 취한 이 노인은 한씨가 평생 듣지도 못한 육두문자를 내뱉었다. 친정어머니에게도 "가정교육을 이따위로 시키냐"라면서 욕을 했다.

한씨는 "분명히 수차례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는데도 참기 힘든 욕을 들어 지금도 팔과 다리가 후들거리는 등 심한 정신적 충격을 받아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울 정도"라며 울먹였다.

한씨의 어머니는 정신적 충격으로 드러눕기까지 했다.

결국, 한씨는 이 노인을 모욕과 협박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사회가 점차 각박해지면서 이런 사소한 일에도 분노를 참지 못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서울지방경찰청은 지난해 2월부터 90일간 난폭·보복운전자를 집중 단속·수사한 결과 732명을 적발했다. 보복운전자들의 절반 이상(167명·55.7%)이 상대 차량의 '진로변경과 끼어들기' 때문에 보복운전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적과 상향등'(27.3%, 42명), '상대 차량의 서행운전'(10.3%, 31명)의 이유도 있었다.

가장 흔한 보복운전 형태는 고의적인 급제동(42.3%, 127명)으로 분석됐다. 차량 밀어붙이기(21%, 63명)와 폭행·욕설(13.3%, 40명)도 많았다.

한 번만 숨 고르기를 했다면 참을 수 있었지만, 분노는 난폭·보복운전으로 이어졌다.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50대 남성은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범행하기도 했다.

전주지법은 지난해 3월 주민이 자신을 비난하자 마을 공동우물에 살충제를 넣은 혐의(음용수유해물혼입)로 기소된 A(54)씨에게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주민과 사이가 좋지 않던 A씨는 2015년 9월 18일 오후 8시께 전북 임실군 한 마을 우물에 다량의 살충제를 부어 넣은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주민들은 평소와 다르게 물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자 경찰에 신고해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

A씨는 "한 주민이 마치 내가 봉지 커피를 훔쳐간 것처럼 말해 홧김에 공동우물에 살충제를 풀었다"고 말했다.

사소한 다툼 때문에 그동안 쌓인 분노와 울분이 터져 나온 것이다.


이런 범죄는 공동체 약화와 개인주의 심화, 성과 중심의 과도한 경쟁 등의 분위기가 반영된 사회 문제로 봐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또 다른 사람에게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존경의 욕구(Esteem Needs)'가 충족되기는커녕 마음의 상처를 입는 상황이 지속하면서 억눌렸던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 범죄로까지 이어진다고 분석했다.

이는 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우가 제시한 '욕구 5단계설'에서 네 번째 욕구가 충족되지 않은데 따라 파생된 문제로 볼 수 있다.

1단계의 생리적 욕구, 2단계의 위협을 피하려는 안전의 욕구, 3단계로 소속감과 주위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자 하는 욕구에 이어 4단계가 바로 인정받고자 하는 '존경의 욕구'다. 5단계는 자아실현의 욕구다.

경찰 관계자는 "각종 폭력 사건에 연루된 피의자를 조사해 보면 '상대가 무시했다고 생각했다', '순간 화가 치솟아 앙갚음하고 싶었다'고 진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모멸감'의 저자인 김찬호 성공회대 초빙교수는 유교문화권에서 체면을 중시하며 살아온 한국인들은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을 유독 참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는 '묻지 마 범죄'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적의가 낮은 행복감, 낮은 자존감과 직결돼 있다고 분석한다.



김 교수는 "날로 심화하는 불평등 지수가 개선되도록 분배의 틀을 다시 만들고 부와 권력의 차이를 절대화하며 멸시하는 문화 풍토를 바꿔야 한다"라며 "아울러 존중과 자존의 문화를 만드는 출발과 귀결이 결국 각자의 내면에 있다는 걸 인식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설승은 김선호 차근호 김동철 기자)

sollenso@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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