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춘순 교수 '조선전기 정치사 연구' 출간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조선 태조 7년(1398) 8월 도성 안에서 피바람이 불었다. 태종 이방원(1367∼1422)이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과 남은 등을 살해한 것이다. 이방원은 이복동생이자 세자였던 이방석도 죽였다. '무인정사'(戊寅定社)라고도 불리는 '제1차 왕자의 난'이다.
태조 이성계(1335∼1408)는 1392년 고려를 멸망시킨 뒤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1356∼1396) 사이에서 낳은 막내아들인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다. 당시 방석을 세자로 추대한 인물은 정도전이었다.
이방원은 이성계가 첫째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1337∼1391)에게서 얻은 다섯째 아들이다. 그는 형제 가운데 유일하게 문과에 급제했고 역성혁명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웠지만 정작 조선이 세워진 뒤에는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 태조는 아들들 대신 정도전과 조준 등 신료를 중심으로 국정을 운영했다. 그래서 제1차 왕자의 난은 흔히 이방원과 정도전의 권력 경쟁이 낳은 참극으로 해석된다.
한춘순 경희대 후마니타스 객원교수는 신간 '조선전기 정치사 연구'(혜안 펴냄)에 쓴 '제1차 왕자의 난의 재검토'란 글에서 제1차 왕자의 난은 이방원이 부친에게 반기를 든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정도전과의 암투가 왕자의 난의 직접적 원인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이방원을 대하는 태조의 이중적 태도를 지적한다. 이방원은 개국 전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는 모임에 형제 중 홀로 참여할 정도의 실세였다. 그러나 태조는 개국공신 52명을 정하면서 이방원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저자는 이방원이 공신에서 배제된 데 대해 "그의 성격이 잔혹하거나 정치적 야심을 보였기 때문이 아니다"며 "신덕왕후가 외척을 내세워 이방원과 태조의 접촉을 차단하고자 했고, 태조가 이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태조는 천도를 위해 계룡산 터를 보러 다닐 때 이방원을 대동했고, 1394년 명나라와의 긴장 관계를 풀 적임자로 이방원을 지목하기도 했다.
저자는 "자신의 권력을 박탈했으면서도 어려운 국면에서는 이용하는 듯한 태조의 태도에 이방원의 원망과 분노가 상당했을 것"이라며 "부친에 대한 이러한 반감이 제1차 왕자의 난의 근본적 원인이 됐다"고 분석했다.
그는 1398년 태조가 개인 소유의 군대인 사병을 혁파해야 한다는 정도전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도 불안정한 정국에서 세자를 보호하고 다른 아들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다고 해석한다.
저자는 "태조는 1398년 들어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면서 "정도전과 조준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병을 거느린 왕자와 종친, 공신들의 존재가 세자에게 위협적일 수 있다고 인식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이방원은 조만간 단행될지 모르는 정치적 숙청에 대한 의구심을 가졌을 것으로 판단된다"며 "막다른 상황에 몰린 이방원이 가졌을 위기감이 엄청났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태조의 둘째 아들인 정종 이방과가 즉위하면서 이방원은 공신에 서훈됐고 정치적 실권을 잡았다. 이방원은 1400년 넷째 형인 이방간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자 이를 제압하고 그해 정종에게서 왕위를 물려받았다.
472쪽. 3만4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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