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佛·네덜란드·獨 선거 개입" vs "아직 입증은…"
(런던=연합뉴스) 황정우 특파원 = "오늘 우리는 두 가지 팩트를 봐야 한다. 두 주요 매체, 러시아투데이(Russia Today)와 국영 스푸트니크(Sputnik)가 가짜 뉴스들을 퍼뜨리고 있다."
오는 4월 프랑스 대선에서 무소속 돌풍을 일으키는 친(親) 유럽연합(EU) 성향의 에마뉘엘 마크롱 전 경제장관의 캠프 제2인자 리샤르 페랑은 13일(현지시간) 마크롱이 과거 레바논을 방문해 "납세자들의 돈으로" 현지 프랑스대사관에서 숙박했다고 주장하는 한 블로그를 가리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분명히 사실이 아닌데도 악(惡)이 자행되고 있다"고 했다.
정당들과 정부 기관들을 타깃 삼은 광범위한 사이버 공격에 대한 우려가 고조되는 가운데 유럽 정부들과 정보기관들이 다가오는 선거에서 러시아의 개입에 대한 경고음을 높이고 있다.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정부와 정보기관들은 대선과 총선을 맞은 올해 이메일 해킹과 유출, 인터넷 봇(bot)으로 소셜 미디어에 가짜 뉴스와 왜곡된 뉴스 살포 등 "여론 조작" 대비에 공조키로 약속했다.
"설득시키려는 게 아니라 혼란에 빠트리려는, 대안적 관점을 주려는 게 아니라 여론을 갈라놓고 궁극적으론 돌아가는 상황에 대한 우리의 이해 능력을 훼손하려는 것이다."
러시아 국영 RT와 스푸트니크의 외국어 서비스에 대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오아나 룽게스쿠스 대변인의 시각이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13일 러시아의 유럽 선거 개입 시도와 관련한 사안들을 정리했다.
◇ 범죄 = 프랑스 대외정보총국(DGSE) 국장은 지난 8일 프랑스 주간지 르 카나르 앙셰네에 러시아가 오는 4~5월 대선에서 극우 국민전선(FN) 마린 르펜을 당선시키려고 개입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밝혔다.
DGSE 국장은 러시아가 인터넷 봇을 통해 소셜 미디어에 르펜에게 유리한 가짜뉴스를 살포할 것이고 해커들에 의해 해킹된 르펜 경쟁자들의 이메일에서 타격을 가하는 내용을 담은 이메일들을 유출할 수 있다고 봤다.
또 덴마크는 러시아를 핵심 사이버 스파이 위협으로 공개 지목했고, 노르웨이는 노동당과 공무원 수 명의 이메일 계정들이 러시아 해킹그룹의 타깃이 돼왔다고 말했다. 이탈리아는 지난해 4개월에 걸친 외무부를 목표로 삼은 악성 소프트웨어 공격의 배후로 러시아를 의심했다. 모두 지난 2주일 새 나온 것들이다.
지난주 네덜란드는 투표 집계 소프트웨어가 해킹될 수 있다는 우려에 오는 3월 총선 개표를 수작업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로날트 플라스터르크 내무장관은 RTL TV에서 "러시아가 선거에 관심을 가질 수 있다는 증거가 있다"면서 이같이 발표했다.
네덜란드 극우 자유당 헤이르트 빌더르스 대표가 외치는 "옳은 것의 혁명"에 담긴 주제들의 다수는 핵심 러시아의 외교정책 우선순위들과 동감을 표현하고 있다.
빌더르스, 르펜, 그리고 반(反)이민의 '독일대안당(AfD) 프라우케 페트리 대표 등은 모두 공개적으로 크림병합과 우크라이나 동부 전쟁 개입을 이유로 한 러시아 제재 해제를 EU에 요구하고 있다.
이들 극우 대표들의 유럽 회의론은 또한 나토를 무너뜨리려는 러시아의 장기적 목표와도 들어맞는다.
크렘린궁이 잠재적 우군이 권력을 잡는 것을 도우려고 선거에 개입할 준비가 돼 있다는 생각은 지난달 미국 정보기관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당선을 위해 "유세에의 영향"을 지시했다는 발표로 주목을 받았다.
유럽연합(EU)이 러시아의 선전전 감시·대응을 위해 신설한 '이스트 스트라트컴 태스크포스'(TF)는 러시아가 유럽에서도 비슷한 노력을 준비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오는 9월 총선에서 4연임 도전에 나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최우선 타깃으로 지목됐다고 TF는 이달초 경고했다.
물론 3월 네덜란드 총선, 4~5월 프랑스 대선, 노르웨이·체코·세르비아 총선도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다.
유럽 정보기관들은 러시아의 전략에 두 개의 기본요소가 있다고 보고 있다. 하나는 미국 대선에서 본 것처럼 문서들을 해킹하고 유출하는 것, 다른 하나는 가짜 뉴스와 왜곡된 뉴스를 생산해 살포하는 것이다.
지난 1월 베를린에서 "13세 러시아 이민자 출신 가정의 13세 소녀 '리자'가 난민신청자들에게 유괴돼 성폭행당했다"라는 가짜 뉴스가 퍼진 게 가짜 뉴스 살포의 대표적인 사례다.
리자는 실제 하룻밤 실종됐고 처음엔 성폭행당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경찰 조사 결과 리자는 친구 집에서 머물고 있었고 성폭행 사건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의 러시아 교민들은 총리실 밖에서 "우리 아이들이 위험에 빠져 있다"는 플래카드를 흔들고 시위를 벌였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독일 정부에 사건을 은폐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한 유럽 관리는 이 사건을 일종의 실험, 메르켈 총리의 이민 정책에 대한 불만을 발화시킬 수 있을 만한 것인지 가늠해보려는 러시아의 '테스트'였다고 본다.
이보다는 덜 두드러지고 덜 조율된 것이지만 지난 주말 또 다른 선전전이 있었다.
위키리크스 창립자 줄리언 어산지가 지난 10일 러시아 친정부 성향의 이즈베티야에 마크롱을 부끄럽게 할 자료를 확보했다고 말했다. 이틀 뒤 러시아의 대표적 친정부 성향의 RT 진행자 키셀레프는 주간 뉴스브리핑에서 '프랑스의 전투'라는 이름으로 마크롱에 대한 공격을 퍼부었다.
다음날 스푸트니크는 미국 은행 계열사에서 일한 마크롱이 "영향력 있는 게이 로비단체"의 지원을 받고 있고 다른 남성과 혼외관계를 맺고 있다는 루머가 있다는 한 프랑스 보수 의원의 인터뷰를 게재했다. 마크롱은 프랑스 대선 주자 중 유일하게 러시아 제재 해제를 주장하지 않은 후보다. 마크롱은 이런 주장을 일축했다.
◇ 대처 하지만 '아직 입증은..." = 유럽의 민간과 정부 당국은 러시아의 선거 개입에 대한 대응을 시작했다.
르 몽드와 AFP 등 8개 프랑스 언론들은 페이스북과 함께 소셜 미디어에서 가짜 뉴스 퇴치에 나서기로 했다. 앞서 페이스북은 지난달 독일에서도 비슷한 일을 시작했다.
유럽연합 이스트 스트라트컴 TF는 현재 그릇된 정보 패턴의 지도를 그리기에 분주하다.
하지만 아직 러시아의 선거개입 의혹을 입증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러시아 선전전을 연구한 독일의 스테판 마이스터 박사는 "PR 전문가들이 하는 미디어 전략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이것은 안보 전략이다. 정보기관들이 운영하는 러시아 연방의 안보 독트린의 일부분이다"고 말했다.
지난주 독일 양대 정보기관인 연방정보국(BND)과 헌법수호청(BfV)은 약 1년간에 조사 끝에 러시아가 "적대적 전략"을 추구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리면서도 리사 사례와 러시아 당국 간 명확한 연결고리를 찾지는 못했다고 발표했다.
한 정보 관리는 "스모킹 건(증거)을 발견하지 못했다. 만일 찾아냈다면 우리는 러시아에 옐로카드를 꺼내 보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 정보기관들은 또 '독일대안당'에 대한 러시아의 자금 지원 의혹도 조사했지만, 증거를 찾지 못했다. 또 한 러시아인이 왓츠앱에 올려 러시아 교민들 사이에서 번진 '아랍 남성들이 밸런타인 데이에 독일 여성들을 마구 성폭행하는 계획을 세웠다'는 내용도 완전히 가짜로 드러났다.
jungwoo@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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