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주의 시선] 우수리스크에 서린 이상설의 애국혼

입력 2017-02-16 07:31  

[김은주의 시선] 우수리스크에 서린 이상설의 애국혼

(서울=연합뉴스) "동지들은 합심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광복을 못 보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남김없이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마라."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7년 3월2일.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망국의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난 보재 이상설이 남긴 서릿발 같은 유언이다. 이역만리에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떠나는 그의 비통한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의 유언대로 시신은 화장됐고 유해는 수이푼강에 뿌려졌다. 그가 쓴 글들과 유품도 함께 거두어 불살라졌다.

1870년 12월7일 충북 진천에서 출생한 이상설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듬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노우키에프스크로 망명했다. 다시 중국 지린성(吉林省) 룽징(龍井)으로 간 그는 항일 민족교육의 요람이 되는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했다. 1907년 고종의 밀지를 받고 이준·이위종 등과 함께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 일본의 침략행위를 전 세계에 알리려고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했다. 만국평화회의가 끝난 후 조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1909년 연해주의 항일전선에 합류해 이후 연해주와 중국을 무대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연해주에서 1910년 유인석·이범윤 등과 함께 한일의병부대인 13도의군과 성명회를 결성했으며, 1911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의 경험을 바탕으로 권업회를 조직하고 민족의식과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해 권업신문을 발행했다. 1914년 이동휘·이동녕 등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임시정부라 할 수 있는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웠다. 1915년에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단체 신한혁명당을 조직하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쳤다.


일제는 1905년 11월 외교권과 통치권을 박탈해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는 내용의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1907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26개국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개최된다는 정보를 얻은 고종은 4월 전 의정부 참찬 이상설, 전 특별법원 검사 이준에게 신임장과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회의 참석 주선을 부탁하는 내용의 친서를 휴대하게 하여 특사로 파견했다. 만국평화회의에서 일제의 폭력적 침략을 알리고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비밀리에 블라디보스토크, 시베리아를 거쳐 당시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해 러시아 황제에게 친서를 전하고 이곳에서 전 주러시아공사관 참서관 이위종과 합류,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했다. 그러나 일본의 로비로 만국평화회의 주최 측은 조선의 자주적인 외교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특사들의 참석을 거부했다. 1907년 7월9일 각국 기자단이 모인 국제협회에 초청된 이위종이 유창한 프랑스어로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경위와 일제의 침략상, 조선의 비참한 실정을 폭로하고 국권 회복에 도움을 줄 것을 호소했다. '한국의 호소(A Plea for Korea)'라는 제목의 이 연설 전문이 헤이그신보 등 세계 각국 언론에 보도되며 시선을 끌었으나 구체적인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다.

끝내 회의 참석이 거부되자 이준은 7월14일 헤이그 현지에서 순국했다. 이상설과 이위종은 이준의 유해를 헤이그의 공동묘지에 가매장한 뒤 영국을 거쳐 미국 등을 순방하며 외교활동을 펼치다가 9월 초 다시 헤이그로 돌아와 이준의 장례를 치렀다.

헤이그 특사 사건은 비록 결실을 거두지 못했으나 을사늑약이 무효이며 조선이 국권 회복을 위해 분투하고 있음을 세계 열강에 최초로 알렸다는 데 역사적 의미가 있다.

이준은 1859년 함남 북청에서 출생해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됐다. 그는 1989년 독립협회에 가입해 만민공동회에서 가두연설을 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1902년 개혁당 운동을 추진했고 1904년 대한협동회를 조직해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저지시켰다. 같은 해 공진회를 세워 일진회 반대 투쟁을 전개했고 1905년 헌정연구회를 만들어 항일운동을 벌였으며 평리원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 검사로 임명됐다. 1905년에는 을사늑약 폐기 상소운동을 전개했고 1906년 보광학교를 설립해 교육 구국운동에 나섰다.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자 서울에 국채보상 연합회의소를 설립해 모금운동을 벌였다.

이위종은 130년 전인 1887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사망연도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위종은 헤이그 특사 사건 이후 러시아제국 사관학교를 졸업, 제1차 세계대전에까지 참전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위종의 부친인 이범진 주러시아 공사는 일제의 소환명령에 불복한 채 6년여동안 공사관을 유지했으나 공사관은 1911년 폐쇄됐다. 이위종은 1910년 국권침탈 이후 러시아에서 자결한 이범진의 장례를 치르고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권업회가 설립되자 이에 참여했으며 항일 의병운동을 전개했다.


올해로 헤이그 특사 사건이 발생한 지 110년, 이상설이 서거한 지 100년이 된다.

이상설의 고향인 진천군은 이상설 순국 100주년을 맞아 4월 21일과 22일 기념행사를 연다. 기념식과 학술대회, 한시 백일장대회, 시낭송 대회, 학생 미술대회, 이상설 평전 출판기념회, 이상설 역사자료 전시회 등을 진행할 예정이다. 생가가 있는 진천읍 산척리 일대에서 추진되는 '보재 이상설 기념관 건립사업'도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이상설이 룽징에 세운 서전서숙은 그가 헤이그 특사로 간 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면서 문을 닫았으나 1908년 간도 보통학교로 다시 문을 연 뒤 지금까지 조선족 사회에서 민족교육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 현재는 룽징실험소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두만강 하구와 맞닿아 있는 연해주에는 1860년대 이후 이주해온 한인들이 한인촌을 이루고 살았다.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와 이어지는 연해주는 항일 독립투쟁의 현장이었다. 안중근, 최재형, 이동녕, 홍범도, 이동휘, 신채호 등이 이곳에서 활약했다. 이 지역은 오늘날 고려인들의 삶의 터전이다.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의 수는 2014년 말 현재 2만9천198명으로, 우수리스크에 1만5천여명이 살고 있다.

그러나 연해주에서 활동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는 여전히 관심 부족 속에서 흔적조차 잊혀가고 있다. 애국지사들과 항일 유적에 대한 학술적 연구조차도 1990년 한국과 러시아가 국교를 수립한 이후에야 가능해졌다.

광활한 황무지였던 우수리스크 수이푼강 유역은 일제의 강압 통치를 피해 이주한 한인들 특유의 근면함으로 개간되어 옥토로 변했다. 발해 성터와 발해 절터 유적지 근처 수이푼 강변 무성하게 자란 수풀 한가운데 이상설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이상설의 유해가 뿌려진 장소는 찾지 못했고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에 의해 2001년 강가에 유허비가 설립됐다. 이 기념비는 한글과 러시아어로 기록돼 있다.

멀리 이국땅에서 조국의 해방만을 염원하며 신산한 삶을 살았던 독립운동가. 죽어서 유해조차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낯선 땅을 떠돌았다. 수이푼 강물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아무르만을 지나 동해로 흐른다. 그의 유해는 강물을 따라 흘러 흘러서 그리운 고국 바다에 다다랐을까.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kej@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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