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연방대법원 낙태 합법화 판결 주인공…가톨릭 개종 후 낙태 반대 앞장서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장현구 특파원 = 미국에서 낙태 합법화를 이끈 선구자에서 나중에는 낙태를 반대하는 저격수로 180도로 태도를 바꾼 노마 매코비가 18일(현지시간) 69세로 사망했다.
미국 언론에 따르면, 미국 텍사스 주 휴스턴에서 서쪽으로 약 47㎞ 떨어진 케이티 시의 노인 요양원에서 머물던 매코비는 지병인 심부전으로 숨을 거뒀다고 그의 일대기를 준비하던 언론인 조슈아 프레이거가 전했다.
매코비는 현재 미국 사회의 뇌관 중 하나인 1973년 미국 연방대법원 낙태 합법 판결을 끌어낸 인물이다.
루이지애나 주 출생으로 텍사스 주 휴스턴과 댈러스에서 성장한 매코비는 16세에 결혼해 1965년 첫 딸 멜리사를 낳았다.
곧바로 이혼 후 음주 등 방탕한 생활로 두 번째 아이를 출산해 입양 가정으로 보낸 매코비는 22세가 된 1969년, 재혼도 안 하고 실직 상태에서 세 번째로 임신하자 낙태 수술을 시도했다.
그는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며 의사에게 낙태 수술을 요구했으나 텍사스 주에선 낙태가 불법이었다.
당시 낙태를 할 수 있는 알래스카, 캘리포니아, 하와이, 뉴욕, 오리건, 워싱턴 등 6개 주(州)의 병원으로 갈 형편이 못되자 낙태를 금한 매코비는 텍사스 주를 상대로 위헌 소송을 건다.
훗날 '로 대(對) 웨이드' 판결로 이어진 소송의 시작이었다.
낙태를 원하는 임신부 매코비는 신분 보호를 위해 제인 로라는 가명을 사용했고, 댈러스 지방검찰청의 헨리 웨이드 검사가 피고소인의 대표가 됐다.
연방대법원은 1973년 1월 22일 대법관 7-2 판결로 수정헌법 14조 적법 절차 조항에 따라 여성의 낙태권을 개인의 사생활 보호 권리의 하나로 포함했다.
즉 낙태를 처벌하거나 제한하는 기존 법률이 사생활 보호와 관련한 헌법적 권리를 침해한다며 위헌 결정을 내린 셈이다. 이 판결로 이후 각 주의 낙태 금지법이 사실상 소멸했다.
연방대법원은 아울러 여성에게 임신 후 6개월까지 임신중절을 선택할 헌법상 권리가 있다고 판시했다. 다만 임신 7개월 이후는 태아를 생명체로 존중할 수 있는 기간이기에 낙태가 금지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여성의 인권과 기본권을 보장한 낙태 합법 판결은 그러나 윤리·종교 문제가 결부되면서 지금도 각종 선거에서 미국 사회를 진보와 보수로 가르는 주요한 의제로 작용한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대부분 낙태를 찬성하는데 반해 보수 공화당 정치인과 지지자들은 대법원 판결의 폐기를 벼르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보수 성향의 닐 고서치 콜로라도 주 연방 항소법원 판사를 연방대법관에 지명해 대법원이 보수 우위(5-4)로 돌아섬에 따라 낙태 판결이 뒤집힐 가능성도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낙태 권리를 얻었지만, 판결이 나오기 전 매코비는 세 번째 아이를 출산해 다시 입양 가정으로 보냈다.
1980년대 자신이 '제인 로'임을 공개하며 언론에 등장한 매코비는 이후 소송 당시 성폭행에 의한 임신 주장이 거짓이었다고 실토하기도 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 열렬한 낙태 옹호자였던 매코비는 그러나 세례를 받고 기독교 복음주의자로 변신한 뒤 180도 태도를 바꿨다.
동성애를 혐오하는 기독교 분위기에 따라 20년 이상 동거해 온 레즈비언 파트너 코니 곤살레스와 1993년 결별하기도 했다.
또 1998년 8월 낙태 반대를 교리로 내세운 가톨릭으로 다시 개종한 뒤엔 반(反) 낙태 운동의 선봉에 섰다.
그는 AP 통신 인터뷰에서 "극단적인 상황에서조차 낙태를 신뢰하지 않는다"면서 "성폭행당해 임신하더라도 아이이며, 신처럼 행동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cany9900@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