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영국령 인도 제국이 1947년 독립할 때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북인도 지역은 파키스탄이라는 이름으로 분리 독립했다. 국토는 양쪽으로 나뉘어 아라비아해 쪽은 서파키스탄, 벵골만 쪽은 동파키스탄으로 불렸는데 종교는 같지만 주로 쓰는 언어는 우르두어와 벵골어로 각기 달랐다. 국토 면적도 넓고 행정력도 장악한 서파키스탄이 1948년 우표, 화폐, 입대 시험 등에 벵골어 사용을 배제하고 우르두어를 유일한 공식 언어로 채택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동파키스탄 주민은 항의 시위를 벌이고 총파업에 나선다.
당국의 탄압에도 반대 운동의 열기가 식지 않는 가운데 1952년 2월 21일 파키스탄 총독이 우르두어 유일 정책을 재천명하자 다카대에는 아침부터 많은 학생이 모여들었다. 정문으로 진입하려는 학생들과 이를 저지하는 경찰 간의 충돌이 빚어지던 중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대학생을 포함한 시민 4명이 숨졌다. 이 사건은 동파키스탄의 분리 운동에 불을 댕겨 동파키스탄은 기나긴 저항과 전쟁 끝에 마침내 1971년 방글라데시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쟁취했다.
유네스코는 1999년 제30차 총회에서 언어의 다양성을 증진하고 소멸 위기에 놓인 모어(母語)를 보호하자는 취지로 벵골어 수호 투쟁이 벌어진 2월 21일을 '국제 모어(母語)의 날'(International Mother Language Day)로 정해 해마다 기념행사와 캠페인을 펼치고 벌이고 있다. 모어는 모국어보다 세분된 개념으로 소수 종족이나 부족이 쓰는 말도 포함된다. 유네스코는 우리나라의 제주도 사투리도 모어의 하나로 분류하고 있다. 올해 유네스코가 '국제 모어의 날'을 맞아 내건 구호는 '다언어 교육을 통한 지속가능한 미래 지향'이다.
성경 번역을 위해 소수 언어를 연구하는 기독교 언어학 봉사단체 국제SIL의 웹사이트 에스놀로그(www.ethnologue.com)에 따르면 지구상에 현존하는 언어는 7천97개를 헤아린다. 인구 103만 명에 1개꼴로 존재하지만 인류의 80% 이상은 92개(1.3%)만을 제1언어(모국어)로 사용하고 있다. 표준 중국어(13억 명)를 필두로 스페인어(4억2천700만 명), 영어(3억4천만 명), 힌디어(2억6천700만 명), 아랍어(2억6천만 명)가 5위권을 형성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어는 한반도와 중국 동북부·러시아 동부 등 7개국 7천730만 명이 사용해 12위에 랭크됐다. 반면에 100명 이하의 사람이 사용하는 소수 언어는 469개이고, 사용자가 없어 이미 소멸한 언어도 220개에 이른다. 지난 1년 사이에도 9개 언어가 지구상에서 사라졌고 소멸 중인 언어는 920개, 소멸 위기에 놓인 언어가 1천524개인 것으로 나타났다.
유네스코가 펴내는 '위험에 빠진 세계 언어 지도'(Atlas of the World's Languages in Danger)는 소멸 위험 언어를 정도에 따라 흰색(취약), 노란색(확실한 위험), 주황색(심각한 위험), 빨간색(치명적 위험), 검은색(소멸) 5단계로 나타내고 있다. 유네스코가 위험 정도를 분류하는 기준은 사용 인구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세대 간의 전승과 단절이다. 대부분의 어린이가 해당 언어를 사용하고 있으나 특정 장소에서만 쓴다면 흰색, 어린이들이 더는 집에서 모국어로 배우지 않는다면 노란색, 노령인구가 사용하고 부모 세대가 이해할 수는 있으나 아이들이나 서로에게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면 주황색, 노령인구만이 언어를 부분적이고 드물게 사용한다면 빨간색으로 분류한다. 2010년판 세계지도에는 소멸 위험을 알리는 색깔 표시가 온 대륙을 수놓은 가운데 우리나라 제주도에도 빨간 표시가 돼 있다. 제주어가 '치명적 위험'에 처한 언어로 분류됐기 때문이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들이 하늘에 닿을 정도의 높은 탑을 세우려고 하자 신은 언어를 각기 다르게 쓰도록 해 탑 건설을 방해하고 인간의 자만심에 벌을 내렸다고 한다. 그러나 독일 언어학자 피터 뮐호이저는 언어의 다양성을 신의 징벌인 소통의 장애물로만 볼 것이 아니라 소중한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오늘날 사용되는 언어들은 각 집단의 삶과 지혜와 적응의 산물로 인류가 수천 년간 노력해온 결과라는 것이다. 에스키모어에는 눈을 가리키는 말이 20가지나 된다. 뉴기니의 한 부족도 어떤 나무의 잎을 쓰임새에 따라 12가지로 다르게 부른다고 한다. 총체적인 문화의 DNA를 담고 있는 한 언어가 사라진다면 이를 사용해온 부족이 축적해온 지혜와 전통도 한꺼번에 자취를 감추고 문화다양성도 그만큼 줄어드는 셈이다.
또 여러 언어를 한꺼번에 가르치는 다언어 교육(Multilingual Education)은 어린이들의 인지능력을 높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고 한다. 유네스코가 소멸해가는 언어를 보호하려고 애쓰고 다언어 교육을 장려하는 까닭도 이를 통해 문화를 풍부하게 하고 세계 평화를 앞당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결혼이주여성들이 자녀에게 모국어를 가르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생업이나 집안일에 바쁘고, 모국어 동화책이나 교재를 구하기도 어려우며, 남편과 시부모가 반대하기 때문이다. 엄마가 자기가 쓰던 언어를 다문화 자녀에게 가르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은 자녀의 이중언어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원활한 의사소통은 자녀의 성장 발달이나 정서 함양에는 물론 가정의 화목과 엄마 심리 안정 등에도 필수적이다. 엄마나라의 문화와 전통과 관습은 엄마나라의 말로만 자녀에게 온전히 전승해줄 수 있다. 다문화 자녀들이 무역, 문화, 관광 등의 분야에서 부모 출신국 간의 가교 구실을 하는 인재로 성장하려면 양국의 언어뿐만 아니라 문화도 함께 익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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