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신사임당의 아름다운 발자취를 찾아서

입력 2017-03-12 08:01  

[연합이매진] 신사임당의 아름다운 발자취를 찾아서




(강릉·파주=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대학자를 길러낸 현모양처, 천재 화가, 5만원권 지폐 모델.

신사임당을 수식하는 말들이다. 이들 수식어만큼이나 그녀의 이미지는 시대에 따라 다양했다. 최근 TV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가 주목받으면서 신사임당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강원도 강릉 오죽헌과 경기도 파주의 율곡 이이(李珥) 선생 유적지에 남겨진 신사임당의 자취를 찾아봤다.

강릉에 있는 보물 제165호 오죽헌(烏竹軒). 조선 중종 때 건축된 정면 3칸, 측면 2칸 단층 팔작지붕의 조그만 일자형 집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주택 건축물 중 하나로, 이곳에서는 조선 시대 최고 여류 화가인 신사임당(1504~1551)과 대학자 율곡 이이(1536~1584)가 태어났다.

사임당은 오죽헌에서 꽤 오래 생활했다. 19살에 이원수와 혼인한 후에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이곳에서 삼년상을 치렀다. 선조 때는 파주 율곡리로 이사해 기거하기도 했지만 홀로 사는 어머니와 주로 함께 보내고 셋째 아들 율곡을 낳은 곳은 오죽헌이었다. 당시는 처가살이가 일반적인 풍습이었다고 한다. 시집에서 생활하는 풍습은 17세기 중반 이후에 정착됐다.

정면 3칸 중 가운데에는 '오죽헌', 오른쪽에는 '몽룡실'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몽룡실은 바로 율곡이 태어난 방이다. 꿈에 용이 나타났다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전해진다. 방에서는 인자한 표정의 사임당이 그림 속에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몽룡실 왼쪽은 넓은 마루로 율곡이 여섯 살까지 놀며 글을 읽던 곳이다. 사임당과 어린 율곡이 마루에 앉아 함께 글을 읽는 모습이 그려지는 듯하다.

마루에는 "예가 아니면 보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도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니, 이 네 가지는 몸을 닦는 요점이다"라는 '격몽요결'의 구절이 게시돼 있다. 바로 옆에는 "사람을 상대하는 데는 마땅히 화평하고 공경하기에 힘써야 하며, 친구를 사귀는 데는 반드시 학문을 좋아하고 착한 일을 좋아하는 사람을 골라서 사귀어야 한다"는 구절도 있다. 모두 현대인이 담고 살아가면 좋은 글귀다.





◇ 사임당 숨결 깃든 고택과 정원

오죽헌 주변으로는 사임당과 율곡 선생이 직접 가꿨다는 수령 600년이 넘은 매화나무, 소나무, 배롱나무가 있다. 신사임당은 특히 매화를 좋아해 맏딸 이름을 '매창'(梅窓)이라 지었고 매화 그림을 즐겨 그렸다. '율곡매'란 이름의 이 매화나무는 천연기념물 484호로 지정돼 있다. 오죽헌에서 사랑채로 가는 길에는 집 이름이 연유한 줄기가 검은 대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오죽헌 뒤쪽 협문을 지나면 바깥채와 안채가 나타난다. 바깥채 주련에는 추사 김정희의 필적으로 판각한 명나라의 시구가 있다. 안채 한쪽에는 사임당이 서울 시집에 있을 때 고향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그리며 지은 '어머니를 그리며'란 시가 보인다. "산 첩첩 내 고향 여기서 천 리/ 꿈속에도 오로지 고향 생각뿐"으로 시작하는 시에서는 어머니를 보고 싶어하는 사임당의 애틋한 마음이 읽힌다.

사랑채를 지나 협문을 나서면 어제각이다. 1788년 정조가 율곡이 사용하던 벼루 뒷면에 글을 새기고 '격몽요결'에 머리글을 지어 내려보내자 이를 보관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어제각 안에는 벼루와 격몽요결 복제품이 전시돼 있다.

사임당은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는데, 맏딸 매창은 어머니의 기질을 물려받아 시(詩)·서(書)·화(畵)에 능했다. 막내 우도 식물과 곤충 그림을 잘 그렸다. 율곡기념관에서는 사임당과 자녀들의 작품과 글을 감상할 수 있다.

인접한 곳에 향토민속관과 강릉시립박물관이 있어 들러보면 좋다. 사임당이 '초충도' 작품 소재로 삼은 식물을 실제로 심어놓은 화단인 '초충단'에서는 드라마 '사임당 빛의 일기' 출연 배우들의 핸드프린팅을 만날 수 있다.





◇ 자운산 자락에서 가족과 영원히 함께하다

사임당은 21세에 시어머니 홍 씨에게 신혼례를 드리러 한양으로 갔다. 그해 9월 첫째 아들 선을 낳은 이후 10여 년간 한양, 파주, 강릉 등지를 옮겨 다니며 생활했다고 한다.

경기도 파주 화석정 인근의 율곡리는 이이의 본가가 있는 곳이다. 율곡은 이곳에서 여섯 살 때부터 살며 학문을 닦았다고 한다. 율곡리는 마을 뒤편 노추산에 밤나무가 많아 붙은 이름이다. 이이의 호(號)도 여기에서 따온 것이다.

인근 동문리에 있는 파주 이이 유적은 사임당과 율곡을 비롯한 가족묘가 있는 곳이다. 유적지에 들어서면 오른편으로 신사임당과 율곡의 커다란 청동상이 눈길을 끈다. 1970년과 1969년 각각 제작된 동상은 원래 사직단에 있었는데 어울리지 않는다는 얘기가 많았다. 이후 문화재청의 사직단 복원 정비계획에 따라 2015년 이곳으로 옮겨졌다.

유적지에는 율곡기념관, 가족묘역, 자운서원이 있다. 율곡기념관에는 '포도도'를 비롯한 사임당의 대표작, 큰딸 매창과 막내 아들 우의 작품, 율곡의 글과 저서가 전시돼 있다. 율곡의 일대기와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전시물도 볼 수 있는데, 강릉 오죽헌의 율곡기념관과 겹치는 전시물이 많다.







사임당은 1551년 음력 5월 17일 새벽 한양 삼청동 집에서 병으로 누운 지 3일 만에 48세로 세상을 떠나 파주 자운산 자락에 묻혔다. 당시 율곡은 16세였다.

키 큰 소나무가 숲을 이룬 계단을 오르면 묘역에 닿는다. 특이한 점은 가장 높은 곳에 이이와 부인 곡산노씨의 묘가 있고, 그 아래에 맏아들 부부의 묘, 다시 그 아래로 사임당과 이원수의 합장묘가 자리한다. 부모보다 자식의 묘소가 위쪽에 있는 것은 자식이 세상에 이름을 알리거나 입신양명했을 때 부모보다 높은 자리에 묘를 쓰는 당시 풍습에 따른 것으로 추정된다.

묘소에서 내려와 오른쪽 길로 가면 율곡과 김장생, 박세채를 배향하는 자운서원이 나타난다. 강인당 앞쪽에는 수령 400년이 넘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하늘을 찌를 듯 우뚝 서 있다. 유적지 안에는 우암 송시열이 지은 '자운서원 묘정비'와 이항복이 지은 '율곡 이이 신도비'가 있다.

율곡은 어머니를 여의고 '선비행장(자기 어머니 사후에 일생의 행적을 적은 글)'을 남겼다.

"자당께서는 진사 신공의 둘째 따님으로 어려서부터 널리 경서에 통하며 문장에 능하고 바느질과 자수와 회화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정묘하였습니다. 겸하여 자질이 온아하고 지조가 정결하여 태도와 거동이 조용하였으며 일을 대함이 섬세하였습니다. 말이 적고 겸손하여 천성은 효성스럽고 지조는 정결하여 신공이 애지중지하였습니다."







dklim@yna.co.kr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3월호 [역사기행] 코너에 실린 글입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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