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갤러리서 안규철 개인전…"머리만 굴리는 작가 아냐"
(서울=연합뉴스) 정아란 기자 = "특별한 퍼포먼스는 아닙니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안규철(62) 작가가 목재 구조물의 가장 높은 곳에 여러 개의 나무 공을 올려놓았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레일에 오른 공들은 천천히 몸을 굴리며 다음 레일로 갈아탔다. 21일 서울 종로구 소격동 국제갤러리 1관에 모인 수십 명이 이 과정을 지켜봤다.
작년 여름 평창동 자택에서 쏟아지는 빗소리를 듣던 안 작가는 '빗물이 바로 바다로 내려가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풀도 자라지 않겠죠. 빗물이 땅에 스며들기도 하고 틈틈이 지상에 머문 덕분에 세상이 있지 않겠어요? 크게 보면 우리의 삶도 이렇게 머무는, 지연되는 과정 자체가 아닐까요." 설치작업 '머무는 시간Ⅰ,Ⅱ'가 탄생한 배경이다.
안 작가는 공처럼 평범한 물건을 사용해 삶과 세상에 대한 생각을 표현한다. 이날 국제갤러리에서 개막한 개인전 '당신만을 위한 말'에도 자전거와 의자 등 일상의 소재들이 작품으로 탈바꿈했다.
'노/의자'는 다리가 배를 젓는 노로 변형된 의자다. 사람이 앉거나 물건을 올려두는 가구의 기능은 없다. '과묵한 종'은 동물 털인 펠트로 만든 종이다. '노/의자'와 마찬가지로 소리를 만들어내는 종으로서의 본디 기능을 상실한 셈이다. 자전거 두 대의 안장과 손잡이가 연결된 '두 대의 자전거'도 마찬가지다. 작가는 작품들을 소개하면서 "어긋나고 빗나간" "우리의 일반적인 기대와 이해 바깥에 있는" 이란 표현을 자주 썼다.
전시 대표작인 '당신만을 위한 말'도 가구인 듯 가구 아닌 형상을 하고 있다. 방음 스펀지로 채워진 시커먼 덩어리는 "나의 잘못을 고백할 수도, 타인의 비밀을 들을 수도 있는 커다란 귀"처럼 보인다.
작가는 이런 어긋난 오브제 작업들을 통해 관객들이 "일상의 거품에서 벗어나" "삶의 궤도 바깥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를 생각했으면 한다고 했다.
미대에서 조소를 전공한 안 작가는 7년간 '계간미술' 기자로 활동한 뒤 독일에서 유학했다. 안 작가에게는 개념미술가라는 설명이 자주 붙는다.
안 작가는 "저더러 개념미술가라고 하는 건 절반만 맞는 말"이라면서 "사유의 과정이 출발점이 되지만 이를 구현하는 과정, 물질에 옷을 입히는 과정 또한 제게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머리만 굴리고 입으로만 떠드는 작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텍스트와 이미지, 말과 사물을 연결하는 크고 작은 아이디어를 구현하고자 합니다."
안 작가는 이날 간담회에서 블랙리스트 파문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배제하는 행위는 우리가 1980년대까지 경험한 것"이라면서 "(과거로) 다시 돌아가 같은 궤도에 올라가는 끔찍한 일이 재연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이번 전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개인전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2015) 이후 2년 만이다.
전시는 3월 31일까지. 문의는 ☎ 02-735-8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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