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공시생 대학 도서관에서 수험서적 훔쳤다 주인 돌려줘
책 주인 "처벌원치 않아" 용서, 경찰은 서적 구입 도움 줘
(광주=연합뉴스) 박철홍 기자 = '책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는 속담이 있으나, 책도둑도 엄연히 처벌받는다.
그러나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라고 생각한 선조들처럼 안타까운 사연으로 책을 훔친 공시생을 피해자와 경찰이 모두 손을 잡아줬다.
지난 12일 오후 광주 북구의 한 대학 단과대 도서관에 허름한 차림의 30대 남성이 영문 약자가 적힌 책을 펼치고 안절부절못하고 앉아있었다.
이 남성은 수년째 기술직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공무원 시험 준비생(공시생) A(33)씨였다.
A씨는 지난 5일 오후 9시 15분께 같은 도서관에서 책을 훔쳤다.
훔친 책은 3만 원가량의 공무원 시험 대비용 한국사 문제집이었다.
밤늦은 시각 책만 놓인 도서관 책상에서 자신에게 꼭 필요한 문제집을 발견한 A씨는 옷에 달린 모자를 눌러쓰고 몰래 문제집을 들고 나왔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문제집이었지만, A씨는 단돈 3만원을 구할 길일 없어 책을 훔쳤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중소기업에 취업했지만, 회사생활이 여의치 않아 퇴사한 후 공무원 시험에 매진했다.
몇 년째 백수로 도서관을 전전한 A씨는 경비원으로 일하는 아버지와 주부인 어머니에게 책값 달라고 손을 벌릴 수 없었다.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주말 오전에만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해 번 돈으로 일주일을 버텼으나, 3만원의 책값은 그에게 거금이었다.
결국 공부하기 위해 책을 훔쳤지만, A씨는 양심의 가책에 괴로워하다가 피해자가 도서관 앞에 붙인 '읽어버린 책을 찾아달라'는 벽보를 보고 무너졌다.
책을 돌려주기 위해 훔친 지 일 주일여만인 12일 오후 책 주인 이름의 영문 약자가 커다랗게 적힌 책이 잘 보이도록 펼쳐놓고 도서관에서 책 주인이 오길 마냥 기다렸다.
30여 분 동안 부끄러움에 붉으락 달아오르는 얼굴을 진정시키며 기다리는 사이 책 주인 B(27)씨가 "어 이거 제 책인데요…"라며 나타났다.
A씨는 고개를 숙이며 책을 훔친 사실을 B씨에게 용서를 구했다.
B씨는 책만 돌려받는다면 A씨를 용서해줄 마음이 있었으나 "이미 경찰에 신고해 버렸는데 어떡하죠"라고 A씨에게 말했다.
이 말을 들은 A씨는 "아… 그럼 제가 자수해야겠네요"라며 스스로 112에 전화를 걸어 자수했다.
피해자 B씨는 "공시생의 마음은 공시생이 안다"며 "책을 찾았으니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뜻을 경찰에게 전달했다.
관할 지구대 조사를 받고 풀려난 A씨를 상대로 정확한 경위를 조사하기 위해 지난 17일 광주 북부경찰서 생활범죄수사팀이 도서관 앞에서 A씨를 다시 만났다.
범행동기를 묻는 과정에서 경찰은 A씨가 훔친 책 대신, 친구에게 2만원을 빌리고 밥값을 아낀 생활비 1만원을 합해 책을 사 공부하고 있다는 딱한 사연을 들었다.
도서관 앞 경찰차 안에서 50대 후반 경찰관은 아들 같은 딱한 피의자의 사연을 듣고 친구에게 빌린돈을 갚고, 밥도 사먹으라며 지갑에서 꺼낸 5만원을 쥐여줬다.
생범팀 팀장은 대학 주변 공무원 수험 서점으로 데려가 A씨가 필요한 수험서를 사주기도 했다.
A씨는 처음에는 "잘한 것도 없는 저 같은 놈한테 왜 이렇게 잘해주시나요"라고 정중히 호의를 사양했지만 "앞으로 더 잘하라고 주는 거라"는 경찰의 말에 조심스럽게 필요한 책을 한 권 골랐다.
그 책도 A씨에게 꼭 필요한 책이었으나, 돈이 없어 살 수 없던 책이었다.
경찰은 A씨가 초범이고, 피해품을 회수했고,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점을 이유로 즉결심판 청구를 하기로 했다.
20만원 이하 벌금이나 선고유예 판결이 가능한 즉심을 받게 되면 A씨는 전과자라는 굴레를 지지 않고 공무원 시험을 계속 준비할 수 있다.
범죄자인 자신에게 따뜻한 도움을 준 경찰관에게 A씨는 "공무원 시험 합격하면 꼭 다시 찾아뵙겠다"고 고개를 떨궜다.
pch80@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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