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 3·1 운동 관련 표석 18개…공사로 옮겨진 곳도
(서울=연합뉴스) 이태수 기자 = 24일 오후 서울 종로구 수송동 수송공원.
신도와 관광객의 발길이 붐비는 조계사를 뒤로하면 한낮 도심 한복판임에도 마치 '섬'처럼 인적이 뚝 끊긴 자그마한 공원이 나타난다. '스윽 스윽' 부지런히 손을 놀리는 청소 직원의 빗자루 소리와 나무 사이사이로 둥지를 튼 새들의 '짹짹' 소리만 정적을 깼다.
종로 빌딩 숲 사이로 숨어 있는 이 공원은 보신각과 탑골공원처럼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엄연히 98년 전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역사의 현장'이다.
바로 이곳이 1919년 2월27일, 3·1 운동을 앞두고 '기미독립선언서'를 인쇄한 '보성사'가 자리했던 터기 때문이다.
한국종교지도자협의회가 설치한 설명판에 따르면 보성사는 30평형 2층 기와 벽돌집으로, 전동 보성학교 구내에 자리했다. 육당 최남선이 초안을 집필하고 민족대표 33명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를 넘겨받아 보성사 사장 이종일, 공장감독 김홍규, 총무 장효근이 그날 밤 3만 5천 부를 인쇄했다.
당시 일본 순사에게 발각될 뻔했지만 '족보책'이라고 둘러대 위기를 넘긴 일화가 지금도 전해져 온다.
이 같은 사실은 공원 한쪽에 자리한 표석(標石·어떤 것을 표시하고 알려주기 위하여 세우는 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보성사 터 표석은 "1919년 3·1 운동 당시 독립선언서와 '조선독립신문'을 비밀리에 인쇄한 천도교의 보성사가 있던 곳"이라고 소개한다.
이 근처를 둘러보던 시민 김경건(19)씨는 "3·1 운동이 종로 일대에서 일어난 줄은 알았지만, 이곳에서 인쇄한 사실은 몰랐다"며 "평소 잘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니 신기하다. 직접 와서 보니 곧 3·1절이라는 게 새삼 실감이 난다"고 말했다.
26일 서울시에 따르면 보성사 터처럼 원래 건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당시 상황을 전하는 3·1 운동 관련 표석은 이달 현재 서울 시내에 18개다. 도심 종로구에 14개로 가장 많고, 중구 3개·마포구 1개다.
수송공원에서 벗어나 종로 큰길로 나오면 많은 인파가 오가는 보신각 앞과 YMCA 건물에서도 각각 3·1 운동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보신각 앞 표석에는 "1919년 3·1독립만세 시위의 중심지로, 4·23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한성정부(漢城政府)를 선포한 곳"이라고 쓰여 있다. 길 건너 YMCA 건물 우리은행 앞 표석은 "이 기독청년회관(YMCA)은 민족운동의 본거지로, 3·1 독립운동을 준비하였던 곳"이라고 소개한다.
3·1 운동을 계획한 손병희·송진우·현상윤 등 흔적은 종로 북쪽 북촌에서 찾을 수 있다.
기당 현상윤 선생 집터는 가회동 서울중앙중학교와 가회동 우체국 사이에 있다.
표석에 따르면 현상윤은 이광수·최남선 등과 함께 신문학 운동을 일으킨 문학가이자 3·1 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다. 그는 이곳에서 '조선유학사'·'조선사상사' 등 저서를 썼고,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납북됐다.
북촌로를 따라 남쪽으로 걸어 내려오다 보면 북촌 박물관 앞에서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 선생의 집터 표지를 찾을 수 있다. 영화 '암살'이 촬영돼 유명세를 치른 백인제가옥으로 들어가는 입구 옆이다.
표지는 "손병희(1861∼1922) 선생은 구한말 천도교 지도자이자 3·1 운동을 이끈 독립운동가"라며 "1897년 동학의 3대 교주가 되었으며, 3·1 운동 때에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으로 3·1 운동을 주도했다"고 소개했다.
고하 송진우의 집터는 율곡로에서 창덕궁길을 따라 북쪽으로 600여m나 한참 들어가야 겨우 만날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 서양화가 고희동의 가옥 바로 인근이다.
현재 송진우 집터는 그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은 채 어느 학원 건물이 됐다. 커다란 학원 간판 아래 마치 문패처럼 검은 대리석으로 새겨진 글씨만이 이곳이 집터임을 알려주고 있다.
당국의 관심이 필요한 표지도 있다.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에 활약한 정치가이자 사회운동가인 이상재(1850∼1927) 선생의 집터는 가회동 주민센터 공사 현장이다. 그러나 주민센터 건설 공사로 표지는 원래 자리에서 수 미터 옮겨져 도로와 '바짝' 붙어 위태로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체통과 마을버스 정류장 사이에 숨어 있는 탓에 이 앞을 지나는 행인조차 이 '돌'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알리는 표지임을 쉽사리 알아채기 어려웠다.
표지는 그래도 한때 이 집터의 주인을 가리켜 "1927년 민족주의를 표방하며 좌·우익이 합작해 만든 사회단체인 신간회의 초대 회장이 되었다"고 꿋꿋이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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