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김정남 피살 사건에 화학무기로 분류되는 치명적 독성물질 'VX'가 사용된 것으로 드러났다. 국제적으로 생산·사용이 금지된 VX는 신경작용제 중 가장 독성이 강해 수 분 만에 목숨을 빼앗는다고 한다. 이번 사건이 북한 소행이라는 증거들이 속속 나오는 가운데 화학 무기용 물질이 범행에 사용된 사실까지 확인됨에 따라 김정은 정권에 대한 국제적 비난이 더욱 거세지게 됐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24일 김정남 시신 부검에서 얻은 샘플을 분석한 결과 사망자의 눈과 얼굴에서 VX가 검출됐다는 관련 당국의 잠정 보고서를 받았다고 발표했다. 말레이시아 경찰은 칼리드 아부 바카르 경찰청장 명의로 발표된 성명에서, VX에 대해 화학무기금지협약(CWC)에 따라 화학무기로 분류된 물질이라고 설명했다. 칼리드 경찰청장은 VX가 북한과 연루돼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거기까지는 나가지 않겠다"며 직접적인 답변을 피했다. 북한은 전날 발표한 '조선법률가위원회 대변인 담화'에서 김정남 피살을 '공화국 공민의 쇼크사'라고 주장했다. 하루 만에 북한 주장이 터무니없는 것으로 드러난 셈이다.
VX는 독성이 매우 강한 화합물로 액체와 기체 상태로 존재한다. 무색무취로 호흡기, 입, 눈, 피부 등을 통해 인체에 흡수된다. 1995년 일본 옴진리교의 도쿄 지하철 테러 당시 사용된 사린가스보다 100배 이상 독성이 강하다고 한다. 1988년 이라크 사담 후세인 정권이 북부 쿠르드족 거주지역에 VX를 살포해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간 것으로 알려졌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에서도 쓰였다는 의혹이 있다. 1997년 발효된 CWC에 따라 190여 개 협약 당사국은 VX의 개발·생산·사용이 금지되고, 보유 중인 무기도 단계적으로 폐기해야 한다. 하지만 북한은 CWC에 가입하지 않아 VX 생산 등에서 규제를 받지 않는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도 VX를 화학전에서만 사용되는 가장 강력한 신경제로 분류하고 있다.
이번 사건은 우리에게 북한의 화학전 능력에 대한 경각심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었다. 북한은 다양한 종류의 화학무기를 대량 제조해 한반도 전역에 뿌릴 수 있는 능력이 있고, 2천500∼5천t으로 추정되는 화학무기 보유량도 미국, 러시아에 이어 세계 3위 수준이라는 게 군과 정보 당국의 평가다. 한국국방연구원(KIDA)이 작년 발간한 자료에 따르면 북한이 보유 중인 것으로 추정되는 화학 작용제는 25종에 달한다. 또 북한은 1987년 생물무기협약(BWC)에 가입했지만, 생물 무기용 병원체를 13종이나 보유한 것으로 군 당국은 추정한다. 북한의 화학무기는 그동안 핵과 미사일 문제에 가려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정부는 김정남 피살 사건을 계기로 북한의 화학전 능력에 대한 대비 태세를 재점검하기 바란다. 국제적으로 이 문제를 이슈화해 제재하는 노력도 병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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