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국수·노동력 품앗이가 '돈봉투'로 변질
(서울=연합뉴스) 이도연 기자 = 현대 결혼식과 장례식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은 축의·조의금 봉투, 이른바 '부조'는 언제부터 시작된 관습일까.
혼례(婚禮)·상장례(喪葬禮)와 같은 애경사를 이웃끼리 서로 챙기는 관습은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있었지만, 그 형태와 취지는 현재와 크게 달랐다.
지금은 금액을 맞춰 받은 만큼 줘야 하는 '거래'와 '대가'의 의미가 강하지만, 과거에는 큰일을 치를 때 일손이나 현물로서 '십시일반'격으로 돕는 '품앗이' 성격이었다.
금액도 10여년전에는 대체로 3만원에 머물렀으나 최근에는 5만원 또는 10만원으로 올라갔다.
◇ 조선 시대까지 물품·현물 '상부상조'가 주류
26일 한국민속박물관의 한국일생의례사전 등에 따르면 부조(扶助)란 혼례 등에 돈이나 재물을 보내 축하의 뜻을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부조라는 말 자체가 서로 의지하고 서로 돕는다는 뜻의 '상부상조'(相扶相助)에서 유래된 것으로, 처음부터 돈이나 재물의 형태를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돈을 주고받기보다는 혼사나 상례가 있을 때 곡식, 술 등 필요한 물품을 주거나 노동력을 제공하는 초기 형태에서 점차 변형된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 조선 시대 기록에서도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7세기 초반 활동한 학자 장현광(張顯光)의 문집 '여헌집'(旅軒集)을 보면, '계원 중에 남혼여가(男婚女嫁)가 있으면 법식에 따라 혼인에 필요한 물건을 돕도록 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혼례에 필요한 물품으로서 '부조'가 이뤄졌다는 뜻이다.
18세기 중기 광주부 경안면 2리에서 작성된 '동약'(同約)에도 '물건으로 혼례 손님을 치르는 비용을 도와준다'는 내용이 나온다.
현물 대신 현금을 주는 부조가 등장한 시점은 18세기 즈음으로 짐작된다.
역관 홍우재의 '동사록'과 정약용의 '다산 시문집'에 "현금으로 부조했다"는 기록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후 구한말 왕실과 관청에 그릇을 납품하던 공인 지씨가 쓴 '하재일기'(荷齋日記)에도 각종 혼례와 상례·제례에 돈과 물품을 부조했다는 내용이 있다.
당사자와의 관계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대체로 10냥·15냥·20냥 정도를 줬고 가끔 50냥까지 부조하기도 했다.
당시 쌀 1되에 3냥 2푼~3냥 3푼 정도였으므로, 당시 부조 금액은 쌀 3~6되 정도의 가치였다. 물품으로는 떡 한 시루, 술 한 동이, 국수 한 박스, 백지·초 등을 부조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부조는 물건이건 돈이건 상관없이 자신의 형편에 따라 돕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표현하는 순수한 '예(禮)'였던 셈이다.
◇ 1980년 전후 축의금 접수대 등장…계좌이체·대행서비스까지
1900년대까지도 여전히 부조의 상당수는 현금이 아닌 물품으로 이뤄졌다.
제주도에서는 20세기 중반까지 혼례식에 곡식으로 부조했고, 경상북도에서도 쌀·감주·술 등을 줘 도왔다. 누가 어떤 것을 얼마나 부조했는지 기록한 '부조록'에도 이런 현물의 종류와 수량이 남아있다.
오늘날과 같은 현금 부조가 등장한 것은 1970년~1980년대로 추정된다.
198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부조록에 물품 대신 축의금 액수가 적히기 시작했다. 이후 예식장 입구에는 속속 축의금 접수대가 등장했고, 돈이 든 흰 봉투가 그 위로 건네졌다. 1990년대부터는 결혼식에서 축의금(祝儀金)이 완전히 보편화했다.
축의금 수준도 물가 상승 폭 이상으로 쑥쑥 높아지는 추세다.
2000년 이전에는 1만~2만 원이면 충분했지만, 2000년대 초반 사회 통념상 최소 금액이 3만 원으로 올랐고, 최근에는 가까운 사이의 경우 5만 원도 내기가 어색한 분위기가 됐다.
따라서 청첩장이나 부고를 접할 때마다 5만 원, 10만 원, 아니면 중간 수준인 7만 원을 낼지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며 '눈치'를 보는 일이 흔한 풍경이 됐다.
심지어 축의금이나 조의금을 직접 봉투에 담아 건네지 않는 경우도 많다. 계좌이체로 송금하거나 경조사비를 대신 내주는 인터넷 서비스까지 등장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축하, 애도하는 마음'이라는 본질은 희미해지고 '돈 거래'라는 형식만 남게 되면서, 청첩장과 부고를 '고지서'라고 자조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대안의 하나로 친척과 친한 친구·지인 등 극소수만 초대해 '작은 결혼식'을 치르는 젊은 부부들도 늘고 있다.
dy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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