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인이 준 봉투 열어보니 돈 대신 손편지"
미국·유럽, 손편지·카드·생활용품 선물이 전부
(서울=연합뉴스) 유통팀 = "당연히 축의금이 들어있을 줄 알고 봉투를 열어보니 A4 한 장 빼곡히 손글씨로 쓴 편지가 들어있더라고요. 감동하기도 했고, 참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김 모(서울 본동·42) 씨는 영어 신문사에 근무하던 당시 결혼을 앞두고 영국인 에디터(편집자)로부터 흰 봉투를 받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결혼을 축복하는 손편지를 읽으면서, 봉투를 열기 전 잠시나마 '이 분 벌써 한국 문화에 적응했네'라고 생각하며 돈을 기대했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됐다고 김 씨는 말했다.
이처럼 한국인의 다수는 경조사 문화의 핵심을 '부조 돈 봉투'로 여기고, 줄 때는 경제적 부담을 느끼고 받을 때는 자신이 상대방에게 냈던 경조사비와 비교하는 '계산'을 하는 게 현실이다.
다른 나라에서도 경조사 축하·애도 현장의 대표적 장면이 흰 봉투를 들고 줄을 서서 식권과 바꿔가는 사람들의 행렬일까.
미국과 유럽 등 서구에서 경조사에 주고받는 것은 돈이 아니라 주로 편지·카드·선물이다.
영국 사람들은 지인의 혼례를 축하할 때 무엇보다 손으로 쓴 카드나 편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영국 런던에서 4년 동안 생활한 한 모(42) 씨는 "영국인들은 손수 축하 메시지를 적은 편지와 카드만 건네기도 하고, 선물하더라도 주로 향초, 찻잔, 홈인테리어 제품, 생활용품 등 신혼살림에 필요한 간단한 소품들을 준다"고 전했다.
장례식의 경우 상을 당한 집에 물건이나 돈을 주는 일은 매우 드물다. 장례식에 필요한 꽃이나 과일 등을 사 가는 정도다.
한 씨는 "영국 내 교민 사회에서는 역시 한국 문화에 따라 축의·조의금 봉투를 주고받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같은 유럽 내 프랑스도 크게 다르지 않다.
8년 동안 정부 산하 공사의 프랑스 지사장으로 근무한 김 모 씨는 "여동생이 프랑스 현지에서 결혼식을 치렀는데, 주변 사람들이 돈을 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며 "대부분이 소형 가전제품이나 생활용품 등 신혼살림에 필요한 작은 물건을 선물해주는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더구나 프랑스인들은 장례식의 경우 진심으로 추도하는 것 외에 상을 당한 집에 '무엇인가 줘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거의 하지 않는다는 게 김 씨의 설명이다.
다만 김 씨는 "최근 젊은 프랑스인들 사이에서는 결혼식의 경우, '편리함' 때문에 선물 대신 50~150유로 정도의 돈을 주는 사례도 조금씩 늘고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에서도 축의·조의금 돈 봉투를 주는 일은 매우 드물다.
기본적으로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친척이나 아주 친한 지인이 아니면 초대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처럼 결혼식에 수 백 명이 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거나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결혼식 선물도 영국처럼 간단한 생활용품이 대부분이다. 신랑·신부가 미리 선물 목록을 만들면 친구나 지인들이 이 가운데 자신의 형편에 맞는 것을 골라 마련해주는 방식이 흔하다.
결혼을 앞둔 신부의 파티(브라이덜 샤워)에서 아기를 낳기 전이라도 출산을 고려해 아이 용품을 선물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극명한 부조 문화 차이의 배경을 결혼·장례식 규모·비용에서 찾는 시각도 있다.
영국에서 1년 연수 경험이 있는 정 모(고양시) 씨는 "영국에서 장례식에 한 번 가봤는데, 장의사 사무실 같은 장소에서 꼭 참석해야 할 가족, 지인들만 모여 정말 엄숙하지만 간소하게 치렀다"며 "애·경사 비용 자체가 많이 들지 않으니, 우리나라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돈을 기대하거나 주위 사람들도 돈으로 도움을 줘야겠다는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터키의 경우 장례식 조의금 문화는 없지만, 결혼식에서는 금을 걸어주거나 100~200터키리라(한화 3만~7만 원)의 축의금을 주기도 한다.
한국에서 오늘날과 같은 현금 부조가 등장한 것은 1970년~1980년대로 추정된다.
1980년대부터는 본격적으로 부조록에 물품 대신 축의금 액수가 적히기 시작했다. 이후 예식장 입구에는 속속 축의금 접수대가 등장했고, 돈이 든 흰 봉투가 그 위로 건네졌다. 1990년대부터는 결혼식에서 축의금(祝儀金)이 완전히 보편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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