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경성학교 영어 교사 이형식은 오후 두 시 사년급 영어 시간을 마치고 내려쬐는 유월 볕에 땀을 흘리면서 안동 김 장로의 집으로 간다. 김 장로의 딸 선형(善馨)이가 명년에 미국 유학을 가기 위하여 영어를 준비할 차로 이형식을 매일 한 시간씩 가정교사로 초빙하여 오늘 오후 세 시부터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음이라. 이형식은 아직 독신이라, 남의 여자와 가까이 교제하여 본 적이 없고, 이렇게 순결한 청년이 흔히 그러한 모양으로 젊은 여자를 대하면 자연 수줍은 생각이 나서 얼굴이 확확 달며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17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월1일 자에 25세 청년 이광수가 쓴 '무정'이라는 소설이 위 문장을 시작으로 연재에 들어갔다. 첫회는 11면에 실렸으나 2회부터는 1면에 게재됐다. 이 소설이 한국 문학사의 새로운 장을 연 최초의 현대 장편소설이다.
순 한글로 쓰인 이 소설은 그해 6월14일까지 126회에 걸쳐 연재돼 열광적인 인기를 끌었다. 매일신보는 이 소설로 판매부수가 신장하자 당시 도쿄 유학생이던 이광수의 원고료를 두 배로 올렸으며 소설 연재가 끝난 후 이광수를 남쪽 지역에 특파원으로 파견, '5도답파기'를 쓰게 했다. 또한 그해 11월에 또 다른 장편소설을 청탁해 '개척자'를 연재하게 했다.
'무정'의 주인공 이형식은 일본 유학을 다녀와서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지식인이고 박영채는 전통적 유교교육을 받은 여성이었으나 적극적인 모습으로 변화하는 인물이며 김선형은 신교육을 받았으면서도 수동적인 인물이다. '무정'은 이 세 사람을 통해 격변기 조선사회의 봉건적인 요소를 비판하고 새 시대를 향한 진취적인 모습을 제시하는 계몽주의 소설이다. 여러 사건과 내적인 갈등을 봉합하고 세 사람이 미국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면서 앞으로 교육가가 되어 조선 사람을 구제할 것을 다짐하는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무정'은 그전까지 있었던 신소설의 과도기적 성격에서 벗어나 우리 문학사에서 새로운 차원을 개척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언문일치의 구어체로 쓰인 데다 서술이 구체적이고 치밀하며 구성이나 대화, 장면묘사 등이 현대소설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다.
그때까지만 해도 한글 소설은 교육수준이 낮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했으며 주된 독자층은 여성들이었다. '무정'은 한글 소설을 무시하고 외면해온 남성 지식인들을 독자로 끌어들인 최초의 소설이었다.
'무정'은 당시 식민지 조선의 거의 모든 사회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작품에서 두드러진 것은 계몽성과 반봉건 의식이다.
이 작품에는 민족에 대한 각성, 근대 문명에 대한 동경, 교육의 중요성, 자유연애, 기독교 신앙, 조혼문제의 심각성, 남녀평등에 대한 인식 등이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젊은층에 식민지 조선에서의 무기력한 삶에서 벗어나 무언가 의미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새로운 의지를 불러일으키게 한 작품이 '무정'이었다.
그러나 '무정'은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지만 관념적 이상주의로 흐르는 한계도 드러냈다. 이 소설에서 이광수가 내세운 민족주의는 민족의 독립과 자주, 자강을 추구하는 민족주의가 아니었다. 일제의 식민통치를 그대로 받아들인 채 계몽만을 내세웠다. 일본식 근대화를 모범으로 삼았고 거기서 친일의 논리가 나왔다.
'무정'은 1918년 최남선이 설립한 신문관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돼 베스트셀러를 기록했으며 일제강점기에만 8판에 걸쳐 인쇄됐다. 1939년에는 이기채 감독에 의해 영화로도 제작됐다.
3월4일은 125년 전 이광수가 태어난 날이다. 이광수는 1892년 평안도 정주의 소작농 가정에서 태어났다. 10살에 부모를 여의고 이후 동학에 들어가 서기가 됐으나 관헌의 탄압이 심해지자 1904년 상경했다. 일진회의 추천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1907년 메이지학원 중학부에 편입했다. 이때 도쿄에서 도산 안창호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았다. 1910년 메이지학원을 졸업하고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가 1915년 9월 김성수의 후원으로 와세다대학 고등예과에 편입했다. 1919년 1월 도쿄 유학생회의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해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상하이로 탈출, 신한청년당에 가담했다. 그해 7월 임시정부 사료편찬위원회 주임을 맡았고 8월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이 됐다. 1920년 4월 흥사단에 입단했다.
1921년 상하이에서 귀국한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됐으나 곧바로 불기소 처분을 받아 변절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1922년 종학원 교사로 초빙돼 철학, 논리학을, 경성학교와 경신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같은 해 5월 잡지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이 글에서 우리 민족이 쇠퇴한 것은 도덕적 타락 때문이라고 했다. 1923년 동아일보에 입사했으나 이듬해 동아일보에 연재하던 '민족적 경륜'의 내용이 거센 비판을 받자 퇴사했다. 1926년 11월 동아일보 편집국장이 됐고 1933년에는 조선일보 부사장에 취임해 1934년 5월까지 활동했다.
그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됐다가 반년 만에 병보석으로 나와 법원에 사상전향서를 제출하고 무죄판결을 받았다. 이후 본격적으로 친일의 길을 걸었다. 앞장서서 창씨개명을 했으며 1939년 친일 어용단체 조선문인협회 회장이 돼 전선 병사 위문대·위문문 보내기 행사를 주도하는 등 수많은 친일단체 활동에 참여했다.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을 노골적으로 지지했으며 징병제·징용제 실시를 환영하는 기고, 강연 등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42년 5월 조선임전보국단 주최 징병제도 연설회에서 '획기적 대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했으며 1943년 11월 일본 내 한국인 유학생들의 입대를 권유하는 '선배 격려대'에 참여해 유학생들의 입대를 노골적으로 권유했다. 1944년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결전태세즉응 재선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았으며 11월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석했다.
이러한 친일 행위로 광복 후 1949년 2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으나 3월 병보석됐고, 8월 불기소 처분됐다. 1950년 7월 납북되어 생사불명이었다가 그해 10월25일 만포에서 병사한 것으로 확인됐다.
그는 젊은 시절 '조선의 천재'로 이름을 날렸다. '민족의 지성'이라 할 만했다. 언론인으로 활약했으며 뛰어난 문학작품들을 통해 우리 문학사 초기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광수는 "민족을 위해서" 친일을 했다고 주장했다. 1948년 12월 펴낸 '나의 고백'에서 자신의 친일 행각을 다음과 같이 변명했다.
"…일정(日政)에 세금을 바치고, 호적을 하고, 법률에 복종하고, 일장기를 달고, 황국신민서사를 부르고, 신사에 참배하고, 국방헌금을 내고, 관공립 학교에 자녀를 보내고 한 것이 모두 일본에의 협력이다. 더 엄격히 말하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도 협력이다. 왜 그런고 하면, 그가 협력을 아니 하였던들 죽었거나, 옥(獄)에 갔겠기 때문이다. 만일 일정(日政) 사십 년에 전혀 일본에 협력하지 아니하고 살아온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는 해외에서 생장한 사람들일 것이니, 이들만 가지고 나라를 하여 갈 수가 있겠는가…"
그의 친일 행적은 많은 사람에게 정신적 상처를 남겼다. 이광수뿐 아니다. 당시 최남선·서정주·노천명·주요한 같은 문필가들을 포함해 민족의 정신적 지주가 돼야 할 수많은 인사가 친일 행위를 저질렀다. 시대가 그러했다고, 시대의 장벽을 뛰어넘지 못했을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시대를 막론하고 사회 지도층은 혜택받은 사람이다. 그만큼 그들이 감당해야 하는 역할이 있다. 평범한 다수가 그들에게 거는 기대를 저버리는 것은 지도층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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