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러시아혁명과 연해주 독립군 수난사

입력 2017-03-07 07:30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러시아혁명과 연해주 독립군 수난사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7년 3월 8일(러시아력으로 2월 23일)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1차대전으로 물자가 부족해진 러시아는 그해 초부터 식량 배급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빵이 다 떨어져 배급을 받지 못하자 여성 노동자들이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빵을 달라"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다. 참가자는 금세 수만 명으로 불어났고 노동자들도 동조 파업을 벌였다.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한 골리친 총리는 전선에 나가 있던 차르(황제) 니콜라이 2세에게 사임을 권유했다. 그러나 니콜라이 2세는 이를 거부하고 수도의 방위와 치안을 맡은 하바로프 사령관에게 진압을 명령했다. 나흘째인 3월 11일(2월 26일),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발포해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는 시민의 분노를 촉발해 극적인 반전을 불러왔다. 진압군으로 파견된 일부 병사가 반란을 일으켜 시위대의 편에 선 것이다. 니콜라이 2세는 진압부대를 증파하지만 이들 대부분도 봉기에 가담했다. 정부 주요 부처와 군사령부는 시위대에 점거당했고 군과 경찰의 무기고도 습격당해 시민군의 손에 무기가 쥐어졌다. 3월 12일에는 모스크바에서도 봉기가 일어났고 다른 도시로도 속속 불길이 옮겨붙었다.


3월 13일 결성된 혁명위원회는 장관들을 체포하며 권력 장악에 나섰다. "제위를 포기해야 독일의 침략에서 러시아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군 장성들의 진언에 따라 이튿날 니콜라이 2세는 동생에게 양위했으나 신변에 위협을 느낀 동생마저 즉위를 거부했다. 이로써 303년 동안 이어내려온 로마노프 왕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역사는 이 사건을 2월혁명이라고 부른다. 러시아는 그해 11월 7일(러시아력 10월 25일) 레닌 등의 주도로 일어난 10월혁명을 거쳐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로 탈바꿈했다.


인류사의 물줄기를 뒤바꾼 러시아혁명은 식민지 상태에 놓여 있던 한반도의 운명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러시아 연해주에 근거지를 둔 독립운동 세력은 변화의 격랑에 휩쓸렸다. 1918년 3월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는 조선혁명가대회가 열렸다. 러시아의 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와 연대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여러 정파의 독립운동가가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양기탁·이동녕 등 민족주의자들이 연대를 반대하자 이동휘를 비롯한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들과 김알렉산드라·오하묵 등 한인 2세 볼셰비키 당원들은 별도로 모여 한인 사회주의 정당을 세우기로 합의했다. 1918년 5월 13일 출범한 한인사회당은 아시아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이었다. 당 중앙위원장에는 구한국군 장교 출신인 이동휘가 선임됐지만 실질적인 창당 주역은 하바롭스크 소비에트 외무위원이자 볼셰비키당 책임비서인 여성 김알렉산드라였다.




한인사회당의 목표는 러시아 볼셰비키와 연대해 조국을 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이었으나 사정은 간단치 않았다. 러시아가 볼셰비키의 적군과 반혁명 세력의 백군이 싸우는 내전에 돌입한 데다 혁명의 불길이 번지는 것을 우려한 열강이 군대를 파병해 백군을 돕고 나섰기 때문이다. 한인사회당이 창설한 한인적위대는 우수리 전투에 참가해 백군과 싸웠다. 이는 국권 상실 후 재러 한인(고려인)이 전개한 최초의 무장투쟁이었다. 그러나 하바롭스크가 백군과 열강의 지배에 들어가자 한인사회당은 아무르주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 과정에서 김알렉산드라 등 적지 않은 한인 볼셰비키 당원이 처형되거나 체포됐고, 이동휘는 1919년 11월 3일 중국 상하이에서 통합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취임했다. 이때 한인사회당도 함께 본부를 상하이로 옮기고 하바롭스크에는 지부를 두었다.



1920년 1월 러시아 적군이 이르쿠츠크를 점령하자 러시아 귀화인 오하묵 등은 이르쿠츠크 공산당 한인지부를 조직했다가 그해 9월 고려공산당 중앙총회라고 이름을 바꿨다. 상하이파로 불린 한인사회당은 민족주의자에서 사회주의자로 변신한 사람이 주축을 이뤄 고려인들의 지지는 두터운 반편 이르쿠츠크파인 고려공산당은 국제공산주의조직 코민테른의 지원을 업고 있다는 강점을 지니고 있었다. 출신과 노선이 다른 두 세력은 주도권을 놓고 각축을 벌였는데, 코민테른이 이르쿠츠크파의 손을 들어주는 과정에서 1921년 6월 28일 빚어진 참극이 '자유(스보보드니)시 참변'이다. 러시아 적군과 이르쿠츠크파의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상하이파를 따르는 사할린의용대와 청산리 전투 후 일제의 진압작전을 피해 러시아로 넘어온 만주 독립군 일부를 공격해 300명 넘게 숨졌다.



자유시 참변으로 러시아의 독립군 세력이 크게 약화됐으며 항일전쟁의 지원 세력이라고 믿었던 볼셰비키의 민낯도 드러났다. 이르쿠츠크파가 몰락하고 상하이파가 주도권을 탈환해 1922년 10월 통합고려공산당을 창설하지만 소비에트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은 것은 물론 러시아 적군도 갑자기 태도를 바꿔 독립군을 무장하제했다. 정통 사회주의자가 아닌 이동휘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지 않았던 데다 일본군이 시베리아와 연해주에서 물러나 조선 독립군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들의 지원을 받아 한반도 진공작전을 펴려던 독립군들은 배신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고려인의 수난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스탈린 정권은 일본과 전쟁을 벌일 경우 연해주 고려인들이 일본 편을 들 것을 우려해 그해 9월 9일부터 12월 말까지 18만여 명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지로 강제이주시켰다. 이송 도중과 도착 직후 추위와 굶주림 등으로 2만여 명이 숨졌다.



소련은 2차대전 때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본 등 추축국에 승리를 거둬 조국 광복에 도움을 주었으나 남북 분단과 6·25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해 한민족에게 통한을 안겼다. 이제 소련이 해체된 지 사반세기를 넘겼고,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서슴없이 혁명을 깎아내리고 있다. 그런데 정작 혁명의 발원지에서 7천㎞나 떨어진 한반도가 100년이 지난 지금에도 혁명의 그늘에서 자유롭지 못하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heeyong@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

    top
    • 마이핀
    • 와우캐시
    • 고객센터
    • 페이스 북
    • 유튜브
    • 카카오페이지

    마이핀

    와우캐시

    와우넷에서 실제 현금과
    동일하게 사용되는 사이버머니
    캐시충전
    서비스 상품
    월정액 서비스
    GOLD 한국경제 TV 실시간 방송
    GOLD PLUS 골드서비스 + VOD 주식강좌
    파트너 방송 파트너방송 + 녹화방송 + 회원전용게시판
    +SMS증권정보 + 골드플러스 서비스

    고객센터

    강연회·행사 더보기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이벤트

    7일간 등록된 일정이 없습니다.

    공지사항 더보기

    open
    핀(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