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얘기도 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얘기

입력 2017-03-08 14:53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얘기

정영문 소설집 '오리무중에 이르다'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나는 여전히 몰티즈의 귀를 접었다 폈다 하고 있었고, 지금은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지만 동시에, 이상하게도 그녀가 날이 시퍼런 커다란 칼을 들고 나타나는 것을 두 눈으로 보고 싶었고, 그것은 아주 간만에 보는 좋은 볼거리가 될 것 같았고, 그래서 지금은 이러고 있을 때라는 생각을 했고, 계속해서 개의 귀를 접었다 폈다 했다."

작가 정영문(52)은 1996년 등단 이후 전통적 서사를 거부하는 글쓰기를 외롭게 해왔다. 독자에게 큰 주목을 끌지는 못했고 상복도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2012년 장편소설 '어떤 작위의 세계'로 한무숙문학상·동인문학상·대산문학상을 석권했다. 5년 전 일이 작가에게 어떤 변화를 일으켰을지도 모를 일이다.

9년 만에 낸 소설집 '오리무중에 이르다'(문학동네)는 작가가 근대소설이라는 전통과 대결을 접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중·단편 4편이 실렸는데 시집처럼 어느 쪽을 펼쳐 읽어도 이상하지 않다. 작가는 사건과 대화로 이야기를 쌓아올리는 대신 공상·기억·꿈의 조각을 늘어놓는다.

맨 앞에 실린 '개의 귀'는 101쪽짜리 중편이지만 인물의 행위와 사건은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을 정도다. 소설가인 주인공이 어느 여자의 아파트에서 몰티즈의 귀를 접었다 폈다 하다가 이제 그만 가는 게 좋겠다는 여자의 말에 집으로 돌아간다. 이 단순한 상황 속에서 주인공은 끊임없이 생각한다. 강아지가 장래에 해탈한 개가 될지, 그것이 강아지에게 좋은 일일지, 강아지를 유괴할지, 유괴한다면 이름을 뭐라고 지을지, 강아지가 나를 비웃는 건 아닌지, 강아지의 멍한 표정이 속임수는 아닌지, 자신의 귀가 접혔다 펴졌다 하는 게 혼란스럽거나 겁을 먹은 것인지…




화자, 즉 '생각하는 사람'은 소설가이고 작가와 사실상 동일한 인물로 보인다. 소설 안의 작가는 종종 글을 쓰려고 생각하지만 이야기는 거의 진전이 없다. 단편 '오리무중에 이르다'에서 화자는 '치어리딩의 어두운 역사'라는 제목의 소설을 구상한다. 그러나 "다 그만두고 잠이나 자는 게 낫겠어"라는 문장으로 시작해 "다 그만두고 잠이나 잘 걸"이라는 문장으로 끝날 수도 있다고 생각만 할 뿐 한 글자도 쓰지는 않는다.

작가는 전작에서 "시대를 반영하는 소설, 상처와 위안과 치유에 대해 얘기하는 소설, 등장인물의 생각보다 행위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소설, 거창한 소설, 감동을 주는 소설" 등을 싫어한다며 자신의 문학관을 내보였다. '개의 귀'에서도 화자는 생각한다. "인물뿐만 아니라 사물조차도, 아무것도 등장시키고 싶지 않았다. 물론 그런 소설을 쓰는 것은 불가능했는데, 내가 정말 쓰고 싶은 것은 쓰는 것이 불가능한, 불가능한 소설이었다."

문학이 '쓸모'라는 속물적 잣대와 싸우듯, 정영문은 나른하고 무의미한 중얼거림으로 소설의 전통에 맞선다. 통상의 독법으로 읽자면 난감하기만 하고 "아무런 맥락도 없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인 얘기를 하는, 그래서 아무 것도 말하는 것이 없는 것에 대해 말하는" 정영문의 소설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힘은 의외로 논리적인 문장에 담긴 유머다.

"아직도 그런 식의 치어리딩이 21세기의 대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게 놀라웠는데, 어쩐지 그것은 21세기가 지나 22세기가 되어도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았고, 그로 인해 거의 시대를 초월한 치어리딩 같기도 했다. (…) 그들이 하는 치어리딩은 시대를 너무도 심하게 역행해 거의 원시적인 치어리딩처럼 보였고, 그들은 치어리딩의 원시시대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고, 나는 잠시 그들이 돌칼과 돌도끼를 들고 하는 치어리딩을 상상하기도 했다."

304쪽. 1만3천500원.

dada@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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