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동맹' 회의 "극우·포퓰리즘 제압은 신자유주의 극복으로"
(서울=연합뉴스) 최병국 기자 = "11년 동안 철옹성같이 보수 정당 집권을 이끌어온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권좌에서 끌어내릴 가능성이 큰 중도좌파 정치인이 세계적으로 발호하는 극우 민족주의와 포퓰리즘을 잠재우며 진보정치를 복원하는 일도 주도할 수 있을까?"
독일 공영 도이체벨레 방송과 미국 블룸버그통신 등은 지난 13일 베를린에서 열린 '진보동맹'(Progressive Alliance ; PA) 연례총회와 관련, 마르틴 슐츠 독일 사회민주당 총리 후보의 발언에 주목하면서 이들이 추진하는 '세상의 변화' 내용을 소개, 분석하고 향방을 진단했다.
독일 사민당이 주도해 2013년 창설한 PA는 이제 전 세계 140개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단체들의 네트워크로 성장했다.
다양한 성향의 사회(민주)주의 정당과 단체 등을 아우르는 기존 국제조직인 '사회주의 인터내셔널'(SI) 보다는 온건한 사민주의 중심의 중도좌파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올해 PA 행사엔 스웨덴,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포르투갈 등 사민당이 집권한 유럽 국가 총리들뿐만 아니라 미국 민주당, 인도 국민회의, 우루과이 사회당에 이르기까지 중도좌파 정당과 관련 단체지도자 100여 명이 참석했다
슐츠는 유럽의회 의장을 지내다 홀연 독일 사민당 후보로 선출된 뒤 개인 인기도에서 메르켈을 큰 차이로 추월하고 사민당 지지율마저 1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보수 기민당을 앞지르며 수직상승시켜 각광받는 인물이다.
16일 이들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이날 PA 행사는 영국의 브렉시트 결정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당선을 비롯해 유럽과 각국을 뒤흔드는 극우 민족주의(또는 국가주의)·포퓰리즘의 문제를 비판하고 이를 제압할 방안에 초점이 맞춰졌다.
또 그동안 신자유주의와 우파에 밀리며 힘이 빠져 실권하거나 '우향우' 정책으로 권력을 연명해온 각국 진보정치를 반성하고 신자유주의 극복을 모색하는데 할애했다.
파스칼 라미 전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 등이 지원한 내부 준비 그룹이 이번 회의에 내놓은 보고서는 "대안 부족을 이유로 대는 정치가 여러 해 이어지면서 변화와 진보에 대한 비관주의가 지배하고 기존 권력구조를 강화한" 현실을 타개할 장기적 전망과 사고력을 갖춘 정치를 촉구했다.
보고서는 세계 100대 경제 주체 중 69개가 다국적 기업이며 월마트가 스페인, 오스트리아, 네덜란드보다 규모에서 앞선 10위라면서 "세계가 대기업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고 비용은 모든 사람이 치르고 있는 상황에서 '고삐 풀린 대자본' 통제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날 총회의 '주인공'으로 주목받은 슐츠는 연설에서 극우 민족주의·포퓰리즘 등 각종 문제의 뿌리는 신자유주의와 잘못된 세계화이며 이로 인한 불평등 확대와 심화 등의 문제를 바로잡는데 진력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사회정의 확립과 빈곤 극복 등을 통한 새롭고 공정한 세계화가 필요하다"면서 "공급망과 관련한 기업의 책임성과 투명성 의무화, 사회보장 확대, 기본생활을 보장하는 수준의 임금 도입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베를린 소재 시민단체 '유럽 민주주의 랩'의 사무총장 울리케 귀로트는 "신자유주의적 의제들이 퇴조하고 진보적 의제들이 다시 밀려오는 상황에 사민주의가 새로운 순간을 맞고 있다"면서 PA와 슐츠 등의 움직임이 매우 시의적절하다고 평가했다.
세계공공정책연구소(GPPi)의 안드레아 빈더 연구원도 "그간 논쟁을 통해 세계화가 경제성장과 세수 확대 모두에 전적으로 좋다는 생각은 사라졌으며, 이제는 전통 사민주의적 서술이 더 반향이 큰 상황이 됐다"며 이 같은 시각에 동의했다.
빈더 연구원은 다른 방식의 세계화는 얼마든지 가능하며 이미 여러 부문에서 일어나고 있다면서 "일례로 독일은 은행 민영화 압력을 받아왔으나 적정 수준까지만 개방한다는 사회적 합의 하에 정책을 결정했으며 금융산업을 완전개방한 체제에 비해 독일 모델이 금융위기 때 더 탄력과 회복력이 있음을 보여줬다"고 설명했다.
빈더 연구원은 그러나 지난 10~20년 동안 사민주의자들도 신자유주의에 가담해온 상황에서 이런 대세 반전 추세를 힘있게 끌고 갈 인물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사민당 내 우파이자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 노선 지지파였던 슐츠는 이제 보수정당은 물론 슈뢰더 총리의 '우클릭' 노동복지 개혁 정책도 빈부격차 확대 등에 기여한 잘못이 있다며 이를 수정해야 한다고 밝혀 지지율을 높여가면서 PA를 이끌 새 지도자로 기대되고 있다.
그러나 슐츠의 노선은 혁명적이기보다는 점진적 변화를 추구하는 쪽이며, 정권을 잡기 위해선 중도의 표심도 잡아야 하는 조심스러운 처지에 놓여 운신의 폭이 크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빈더 연구원은 독일은 극우민족주의 발흥도 상대적으로 약하고 유럽 금융위기를 큰 피해 없이 견뎌내는 등 유럽 내에서도 독특한 위치에 있고, 금융위기 대가를 독일을 제외한 다른 나라 사람들이 치러야 했다는 점에서 슐츠의 '공정한 세계화'가 설득력이 떨어질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블룸버그 칼럼니스트 레오니드 버시즈키도 PA 이데올로기스트들이 제시한 모델이 나름 설득력이 있다는 시각에서 자세하게 설명한 뒤 그러나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사회주의의 전통적 구호가 안고 있던 문제가 이번 모델에도 발견된다고 지적했다.
즉, 각국 노동자와 시민이 처한 상황과 요구가 달라 독일에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모델이 다른 나라에선 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버시즈키는 또 유권자들이 더 급진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사례들을 들면서 오히려 점진주의가 실패하면 더 크고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이 요구되고 전통좌파의 구호가 재등장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예컨대 보편적 기본소득의 경우 요구하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많은 이에겐 낯설게 보일 것이라면서 그러나 하루 8시간 노동이라는 개념도 과거엔 매우 낯설었다고 덧붙였다.
choibg@yna.co.kr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