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이매진] 흥미진진한 조선의 법궁

입력 2017-04-13 08:01  

[연합이매진] 흥미진진한 조선의 법궁

백성 향한 고뇌 오롯이 담긴 왕의 공간




(서울=연합뉴스) 임동근 기자 = 조선을 대표하는 궁은 경복궁이다. 하지만 가장 오랜 기간 사용된 곳은 창덕궁이었다. 임금이 정사(政事)를 돌보고 생활하던 두 궁에는 조선의 건국 이념과 500여 년 역사가 깃들어 있다. 경복궁과 창덕궁에서 과거를 엿보는 여행을 떠난다.

조선의 궁은 법궁(法宮)과 이궁(離宮)으로 나뉜다. 법궁은 임금의 주요 활동 공간이고 이궁은 법궁의 화재, 전염병 창궐 등 비상시를 대비한 곳이다. 조선의 법궁은 경복궁이었고, 창덕궁은 이궁으로 지어졌다. 하지만 실질적인 법궁 역할은 창덕궁이 더 오래 했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창덕궁은 270년 이상 법궁으로 사용됐다.

1392년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한양을 새 왕조의 수도로 정한 뒤 1395년 백악산(지금의 북악산) 아래 평지에 경복궁을 창건하고 좌우에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두었다. 이후 이궁으로 창덕궁(1405), 창경궁(1418)이 세워졌고 경운궁(1593·현 덕수궁)과 경희궁(1616)이 차례로 생겨났다.

경복궁은 현재 길이 2천404m, 평균 높이 5m, 두께 2m의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근정전을 중심으로 사방에는 건춘문(동), 광화문(남), 영추문(서), 신무문(북)이란 이름의 대문 4개가 있는데 각각 봄·여름·가을·겨울과 나무·불·쇠·물을 상징한다. 이는 오행설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현재 광화문을 마주 보고 오른쪽 도로 한가운데에는 동십자각이 있는데 원래 경복궁의 담은 이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서십자각은 일제강점기에 철거돼 지금은 볼 수 없다.

경복(景福)은 '큰 복을 누려 번영한다'는 뜻으로, 태조의 명을 받은 정도전이 지었다. '시경'(詩經) 주아(周雅)편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네/ 군자는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리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따온 말이다.





◇ 음양오행·유교 이념 반영한 공간


바깥에서부터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을 차례로 지나면 궁궐의 중심인 근정전에 닿는다. 근정(勤政)은 '천하의 일을 부지런히 하여 잘 다스리다'는 뜻이다. 왕의 즉위식, 문무백관의 조회, 외국 사절 접견 등 국가의 중요한 의식을 행하던 곳답게 웅장하고 위엄이 있으며 지붕의 처마 선은 봉황이 날 듯하다.

근정전 안쪽 가운데에는 임금이 앉는 용상이 있고, 뒤로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란 그림이 펼쳐져 있다. 붉은 해(양)와 하얀 보름달(음), 다섯 봉우리(오행)가 담긴 그림은 음양오행의 원리를 상징한다. 그림에는 가로줄 세 개를 가상으로 그릴 수 있는데 이는 삼재(三才, 하늘·땅·사람)를 뜻한다. 하늘과 땅의 이치를 이해한 사람(ㅣ)이 중간에 서야 비로소 그림이 완성되는데 그 사람이 바로 왕(王)이어야 한다는 의미다. 이 그림은 임금이 거처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 다녔다. 천지인 사상을 항상 가슴에 품고 정사에 임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건물 위치도 저마다 뜻이 있다. 근정전 동쪽에는 세자가 기거하는 동궁이 있고, 서쪽 영추문 밖에는 대비가 거처하는 서궁이 있었다. 세자는 떠오르는 해를, 왕이 죽은 이후 남겨진 대비는 지는 해를 상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세자를 '동궁'이라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근정전 둘레 난간에는 동서남북 방향에 수호신인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동물 조각상이 있다. 그리고 근정전 천장 가운데에는 왕을 상징하는 누런 용이 있다. 난간에서는 개와 돼지를 제외한 십이지신 동물상도 볼 수 있는데, 개와 돼지가 빠진 이유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근정문과 근정전을 직선으로 잇는 한가운데 바닥에는 임금만 다닐 수 있는 어도(御道)가 있다. 어도 양쪽에는 신하들이 직급에 따라 자리를 잡도록 표시한 비석 모양 품계석 12개가 있다. 유교적 건국 이념에 따라 동쪽에는 문반, 서쪽에는 무반(군인 출신)이 섰다. 이곳에서는 서울에 거주하는 모든 문무백관이 참여하는 조회가 한 달에 네 번 열렸다.

근정전을 등지고 중앙에 서면 근정문, 흥례문, 광화문을 통해 바깥이 보인다. 하지만 시선의 끝에 보이는 것은 시원스레 뻗은 광화문 대로가 아닌 세종문화회관이다. 경복궁이 서쪽으로 조금 치우쳐 있음을 알 수 있다.


◇ 깊이 생각하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곳



근정전 바로 뒤는 왕의 집무실인 사정전이다. 사정(思政)은 정사에 임할 때 깊이 생각해서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한다는 뜻이다. 업무보고, 회의, 경연 등이 이곳에서 진행됐다.

왕과 신하가 회의하는 상참(常參)은 새벽 3~5시에 열렸다. 특히 세종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상참에 참석하느라 신하들이 피곤해했다고 한다. 어느 날 우의정 류관이 "하루걸러 참석하시는 것이 어떠하온지요?"라고 물었더니 세종은 "앞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기 위해 오시려거든 미리 다른 사람을 시켜서 알리도록 하오"라며 거절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사정전 좌우에는 온돌방을 갖춘 만춘전과 천추전이 있다. 사계절 이용할 수 있는 보조 편전으로 조선 초기에는 세 건물이 복도로 연결돼 있었다고 한다. 조선의 임금은 이들 세 건물을 드나들며 정사를 살폈다. 사정전 앞에는 왕실 재물을 보관하는 행각인 내탕고가 있다.

사정전 뒤 강녕전과 교태전은 왕과 왕비의 일상생활 공간이다. 지금이라면 청와대 관저 정도인 셈이다. 강녕전은 왕이, 교태전은 왕비가 사용했다. 강녕(康寧)은 몸이 건강하고 마음이 편안하다는 뜻으로 임금이 건강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우물 정(井)자 구조로 방이 9개 있는데 가운데는 왕이 사용하고 주위 방에서는 상궁이 숙직을 했다. 임금은 일직선 상에 놓인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을 오가며 살았다.

교태(交泰)는 주역의 원리를 담은 이름이다. 주역의 '태괘'는 땅(음) 아래에 하늘(양)이 있는 모양인데, 무거운 기운이 아래로 내려오고 가벼운 기운이 위로 올라가며 만나 교통(交通)하는 것을 상징한다. 즉 왕과 왕비가 만나 잘 교통하여 후손을 많이 낳기를 바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교태전 뒤편에는 계단식 화단과 굴뚝이 아름다운 후원(後園)인 아미산도 있다.

지금 있는 강녕전과 교태전은 1995년 복원된 것이다. 1917년 창덕궁 침전이 소실되자 이곳 강녕전과 교태전을 뜯어 희정당과 대조전을 짓는 데 사용했기 때문이다.

교태전 북동쪽에는 자경전이 있다. 고종 즉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헌종의 어머니 신정왕후 조씨를 위해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재건 때인 1865년 궁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로 거처를 지어 은혜에 보답했다. '자경'은 왕실 안어른께 경사가 있기를 바란다는 뜻으로,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창경궁에 자경당을 지은 것에서 비롯됐다. 자경전은 꽃담과 굴뚝이 아름답기로 소문났다. 서쪽 담에는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문양과 꽃을 새겼고, 뒤편 십장생 굴뚝에는 학과 불가사리, 벽사상 등을 배치해 악귀를 막고 장수를 기원했다.







◇ 아름다운 국가 연회장, 경회루



교태전 북쪽은 후궁과 궁녀를 위한 공간인 흥복전 일원이다. 침전으로 쓰이던 전각과 행각이 있었지만 지금은 함화당과 집경당만 남았다. 다시 함화당 북쪽에는 고종이 조성한 향원정과 건청궁이 있다. 건청궁은 왕과 왕비의 처소, 서재가 있던 건물로 1895년 명성황후가 암살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건청궁에서 10년 정도 생활한 고종은 일본의 감시를 피해 1896년 2월 11일 새벽 러시아 공사관으로 갔고, 경복궁에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북문인 신무문 바깥은 원래 경복궁의 후원으로 왕이 직접 농사를 지어보던 내농포, 군사훈련을 점검하는 경무대 등이 있었다. 하지만 일제가 총독관저를 지으며 건물은 모두 사라졌다. 현재 이곳에는 청와대가 들어서 있다.

경복궁의 마지막 명소는 경회루다. 이곳은 큰 연회를 열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한 곳이다. 경회루에 오르면 궐내가 내려다보이고 연못에서는 뱃놀이를 즐길 수 있었다. 경회루는 주역의 원리에 기초해 지었다. 중앙 3칸은 천지인을, 12칸은 열두 달을, 기둥 24개는 24절기를 뜻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경회루를 1867년 재건할 때 물이 불을 다스린다는 의미에서 청동용 두 마리를 연못에 넣었다. 청동용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국가 연회 장소인 경회루가 연산군에게는 유흥의 장소였다. 연산군은 전국에서 아름다운 여성을 선발해 기생으로 만들었다. 이 중 궁궐로 뽑혀 온 '흥청'이라 불린 기생들과 경회루에서 유흥을 즐기고 뱃놀이를 했다. '흥청'은 '맑음을 일으킨다'는 뜻. 하지만 결국 흥청은 '맑음을 망하게'하는 망청이 됐다. '흥청망청'이란 말은 이렇게 생겨났다.



◇ 자연과 조화 이룬 가장 한국적인 궁궐



창덕궁은 1405년 태종 때 창건됐다. 경복궁을 지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태종은 왜 창덕궁을 지었을까. 태종은 경복궁의 형세가 좋지 않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왕자의 난' 때 정도전과 이복동생들을 죽인 장소였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다.

창덕궁은 전각의 배치가 경복궁과는 사뭇 다르다. 경복궁이 백악산 아래 평지에 질서정연하게 조성된 것과 달리 창덕궁은 경사진 지형을 따라 자연스럽게 건축됐다. 건물 각각의 규모도 경복궁과 비교하면 작고 소박하다.

하지만 창덕궁은 임금들이 가장 많이 사랑한 궁궐이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룬 '가장 한국적인 궁궐'로 평가되는 창덕궁은 이후 경희궁, 경운궁 등 다른 궁궐 건축에도 영향을 주었다.

궁궐 대문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돈화문에 들어서 오른쪽 금천교를 건너면 진선문을 통해 전각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진선문에는 신문고가 있었다는데 위치가 정문 안쪽에 있어 백성이 정문을 지나 사용하기는 어려웠을 듯싶다. 신문고를 사용하기보다 왕의 행차에 뛰어들어 어려움을 호소하는 백성이 많았다고 한다.

경복궁에 근정전이 있다면 창덕궁에는 인정전이 있다. 2단 월대 위에 웅장한 중층 전각으로 세워졌는데 월대의 높이가 낮고 난간도 없어 근정전보다 소박한 느낌이다. 내부를 보면 전등, 커튼, 유리 창문이 달린 것도 볼 수 있다. 1908년 서양식으로 개조했기 때문이다.

왕의 집무실인 선정전은 지붕이 특색 있다. 현재 궁궐에 남아 있는 건물 중 유일하게 반짝거리는 청색 기와를 얹고 있다. 청와대가 이곳에서 연유한 게 아닌가 싶다. 선정전은 왕의 공간이지만 왕비가 사용한 적도 있다. 성종 때 공혜왕후 한씨가 노인을 공경하는 풍습을 권장하기 위해 80세 이상 노인을 대상으로 매년 9월 양로연을 베풀 때 이용했다고 한다.

선정전 바로 옆은 침전인 희정당이다. 191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0년 경복궁 강녕전을 뜯어서 복구했다. 지금 모습은 화재 전 희정당이나 강녕전의 모습과는 다르다고 한다. 내부는 역시 카펫, 유리 창문, 샹들리에가 설치된 서양식이다. 이곳은 정조의 손자로 안동 김씨 세력에 맞서 개혁정치를 펼쳤던 효명세자가 22세에 요절한 장소다. 희정당 뒤편은 왕비의 생활 공간인 대조전이다. 대조전 부속건물인 흥복헌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된 현장이다.

창덕궁에는 사대부 주택의 건축 양식을 따른 '낙선재'가 있다. 헌종이 1847년 건축한 것으로, 서재 겸 사랑채로 이용했다. 이듬해에는 경빈 김씨 처소인 석복헌과 대왕대비인 순원왕후를 위한 수강재를 지었다. 헌종과 경빈은 낙선재에서 사랑을 나눴지만 둘 사이에 자식은 없었다. 조선이 폐망한 후에도 왕가의 후손은 이곳에서 지냈다. 순종의 동생으로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영친왕 이은, 영친왕의 부인인 이방자 여사, 고종의 고명딸인 덕혜옹주가 이곳에 기거했다.







◇ 자연 지형 살린 왕실의 휴식처



창덕궁에는 전각 영역 뒤편에 아름다운 후원이 있다. 조선의 왕들이 창덕궁을 사랑한 것도 바로 넓고 아름다운 이 후원 때문으로 여겨진다. 인위적으로 조성하지 않고, 응봉에서 뻗어내린 넓은 산자락을 이용해 골짜기마다 정자를 지었다.

후원의 첫 번째 중심 정원은 부용지다. 약 1천㎡ 넓이의 사각형 연못과 둥근 섬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이 반영됐다. 연못 한쪽에 주변 풍경을 감상하기 좋은 연꽃 모양 부용정이 있고 맞은편 언덕에는 2층 누각인 주합루가 서 있다. 주합루 아래층에는 왕실 직속 도서관인 규장각을 두었고, 위층에는 열람실 겸 누마루를 만들었다. 주합루는 '천지 우주와 통하는 집', 규장각은 '문장을 담당하는 하늘의 별인 규수(奎宿)가 빛나는 집'이란 뜻이다. 아름다운 정원에 걸맞은 낭만적인 이름들이다.

두 번째 정원은 애련지다. 연꽃을 좋아한 숙종이 연못 가운데 섬을 쌓고 정자를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 섬은 볼 수 없고 정자는 연못 북쪽 끝에 서 있다. 숙종은 '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라며 '애련'이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애련지 북쪽에는 곡선 형태의 연못 둘레로 존덕정, 관람정, 폄우사, 승재정 등 다양한 형태의 정자가 있다. 존덕정 안 지붕 아래에는 정조가 재위 22년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세상의 모든 시냇물이 품고 있는 밝은 달의 주인공)라고 스스로 호(號)를 지어 부르고 그 서문을 새긴 나무판이 걸려 있다.

'뭇 개울이 달빛을 받아 빛나지만 달은 오직 하나다. 내가 바로 그 달이요, 너희는 개울이니 내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태극, 음양, 오행의 이치에 합당하다'라는 뜻으로 신하들에게 충성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내용이다. 존덕정 천장 중앙에는 쌍룡이 여의주를 갖고 노는 그림이 있는데 이는 왕권의 지엄함을 상징한다.

존덕정 북쪽은 후원에서 가장 깊은 골짜기인 옥류천이다. 인조 14년(1636)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을 깎아내고 그 위에 홈을 파서 물길을 끌어들이고 작은 폭포를 만든 곳이다. 바위에는 '玉流川'이라 새긴 인조의 친필이 남아 있다. 궁궐 인근에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며 물길이 끊겨 지금은 폭포수가 떨어져 내리는 광경을 볼 수 없는 것이 흠이다.

옥류천을 따라 소요정, 태극정, 농산정, 취한정, 청의정 등 작은 정자가 곳곳에 있다. 청의정은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초가로 바로 앞에는 지금도 벼농사를 짓는 조그만 논이 있다. 임금이 그해 농사의 풍흉을 가늠하고 백성에게 모범을 보이기 위한 궁 안의 경작지다. 이곳에선 현재 일반인이 참여하는 모내기와 벼 베기 행사가 진행된다.







※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17년 4월호 [역사기행] 코너에 실린 글입니다.

dklim@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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