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청량리 588' 철거와 성매매 국제화

입력 2017-03-28 07:30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청량리 588' 철거와 성매매 국제화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서울 동대문구 전농1동 602∼624번지. 흔히 '청량리 588'로 불리는 이곳은 부산 '완월동', 대구 '자갈마당'과 함께 전국 3대 집창촌의 하나로 꼽혔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이 일대에서는 관능적인 옷차림을 한 수백 명의 여성이 대형 유리문을 열고 뭇 남성들을 유혹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한창 호황을 누릴 때는 골목 곳곳에서 성매매 여성과 실랑이하다가 성매수 남성의 옷에서 지폐가 빠져나오기도 하고 취객들이 흘리는 동전도 적지 않아 새벽에 그 돈만 잘 긁어모아도 집을 한 채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은 폭격 맞은 전쟁터처럼 폐허로 변했다. 공터마다 둘러쳐 놓은 황갈색 가림막에는 붉은색과 검은색 페인트로 '성매매를 한 사람은 징역 1년 벌금 300만 원', '성매매는 불법, 신고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일부 남은 건물에도 커다란 가위표가 그려져 있거나 깨진 유리창과 거울 조각이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다. 아직 이곳을 떠나지 않고 있는 몇몇 업소도 불을 켜놓고 영업하는 시늉만 낼 뿐 호객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곳곳에 달린 CCTV와 섬뜩한 내용의 경고문을 무시한 채 업소를 들어설 배짱 좋은 남성도 있을 리 만무해 보인다.


서울의 집창촌 1번지로 불리던 이곳도 2004년 성매매 방지 특별법이 발효되자 직격탄을 맞았다. 손님이 줄어들자 성매매 업주와 여성도 하나둘씩 떠났다. 1994년 일찌감치 결정됐으나 주민 간의 이견으로 제자리걸음을 하던 재개발 사업은 2015년 본궤도에 올랐다. 지루한 협상 끝에 재개발추진위원회는 지난해 12월 남은 8개 업소를 상대로 강제철거를 시도해 물리적 충돌이 빚어지기도 했다. 동절기에 강제집행이 중단됐다가 이번 달 재개됐다. 추진위는 2021년까지 이곳에 65층 규모의 주상복합건물 4개 동과 42층짜리 호텔을 지을 계획이다.


역사 속으로 사라질 운명에 놓인 곳은 '청량리 588'만이 아니다. 부산시 서구는 완월동 집창촌을 폐쇄하기로 하고 태스크포스를 가동하고 있으며, 대구시와 중구청은 도원동의 속칭 자갈마당에 CCTV와 경고 전광판을 설치하고 집중 단속을 벌이는 등 고사작전에 나섰다. 인천 숭의동의 엘로하우스에도 35층짜리 주상복합 아파트 건설이 추진되고 있다. 파주 용주골, 전주 선미촌, 수원역 앞 등도 문화공간이나 상업지구로 탈바꿈할 예정이다.




우리나라에는 공인된 매춘업이 없었다. 여사당이나 기생 등이 몸을 팔기는 했으나 성매매가 본업은 아니었고 집단으로 성매매가 이뤄지는 곳도 없었다. 한국의 매춘업은 개항 후 일본인과 함께 흘러들어온 것이다. 일본에서는 16세기 후반부터 유곽이라는 공인된 성매매 집결지가 형성됐다.


1895년 청일전쟁이 끝난 뒤 일본군의 주둔지 부근에 요릿집이나 여인숙을 가장한 윤락업소가 생겨났고 1902년 7월 24일 부산 신창동에 최초의 유곽인 안락정이 간판을 내걸었다. 주변에 유사 업소들이 들어서 장소가 비좁아지자 1907년 자리를 옮겨 완월동 사창가의 뿌리를 이룬다. 1902년 12월 인천 선화동에 세워진 유곽은 1960년대 숭인동으로 옮겨가 훗날 옐로하우스로 발전했다. 1904년 원산과 서울 쌍림동에도 각각 유곽이 들어서고 대구, 청진, 목포, 대전 등지로 번져간다. 일제는 1908년 '창기 단속령'을 발표한 데 이어 1911년 성매매 여성의 성병 검사를 의무화해 매춘은 공인 직업이 됐다. 1926년에는 공창 제도를 도입하고 성매매 여성에게 세금을 징수했다.




법의 보호를 받게 되자 사창가는 주요 기차역을 중심으로 전국화되는 경향을 띠었다. 일제의 비호와 권장 아래 매음이 마치 근대화의 상징인 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미국의 일간지 시카고트리뷴은 1919년 12월 26일자 서울발 기사로 "일본이 조선에서 가장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는 인종차별적인 윤락가를 만든 것"이라며 "조선에는 없던 이러한 악의 거리는 조선인 남녀의 성적 타락을 위해 일본이 치밀하게 도입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1923년 일왕을 폭살하려 한 박열 열사도 경찰 신문조서에서 "일본 정부가 은근히 매춘을 장려하고 일본으로부터 성병을 유입해 방치하는 것은 조선인의 멸망을 꾀하고 있는 증거"라고 질타했다.



해방 후 미 군정이 1946년 부녀자 매매를 금지령을 내리고 이듬해 공창제를 폐지했으나 성매매는 오히려 증가했다. 전쟁통에 생활 전선으로 내몰린 부녀자가 급증한 데다 서울 용산, 인천 부평, 부산 범전동, 전북 군산, 경기 파주 등 미군기지 주변에 유곽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이승만 정권은 미군 위안 시설을 만들어 성매매 여성을 격리 수용하기도 했는데, 최근 이들에 대한 국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이 나왔다.





1961년 윤락행위방지법이 제정됐으나 선언적 의미에 그쳤고, 이듬해 정부가 기지촌 32곳과 성매매 집결지 104곳을 특정 지역으로 선정해 공창 아닌 공창을 인정한 꼴이 됐다. 박정희 정권은 기지촌의 성매매와 일본인 기생관광이 외화벌이에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사실상 묵인했다. 서울 종로3가(종삼)와 양동 등지의 일부 사창가를 없애긴 했으나 이는 도심 재개발 차원이었다. '불도저'로 불린 김현옥 서울시장이 1966년 세운상가 건설을 밀어붙일 때 종삼의 한 성매매 여성에게 옷깃을 잡히며 성매매를 권유받았다가 이 일대의 사창가를 모두 없애버렸다는 일화도 있다. 전두환·노태우 정권 시절이던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 때는 경기장에서 가까운 속칭 '천호동 텍사스'가 외국 선수단과 관광객의 '명소'로 떠오르기도 했다.



1989년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고 1990년대 들어 외국인의 유입이 늘어나면서 성매매의 '국제화'(?)는 더욱 가속화됐다. 동남아 등지로 엽색관광에 나서는 남성이 생겨나는가 하면 공연 비자로 들어온 러시아·중앙아시아·동남아 등의 여성이 몸을 팔다가 적발되는 일이 빈발하고 있다. 외세의 침투에 따라 생겨난 집창촌의 홍등이 성매매 방지 특별법과 도심 재개발에 떠밀려 하나둘씩 꺼져가고 있다. 그러나 이른바 풍선 효과 때문에 성매매가 오피스텔과 주택가로 스며들고, IT 기술의 발달과 국경의 장벽 완화에 힘입어 첨단화·세계화하고 있다.



heeyo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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