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은 한국영화 소개하고 싶어…독창적 이야기·스타일에 伊관객 호응"
김동호 "월드컵 후 反韓감정 잠재우려 창설한 영화제 15년째 순항"
(피렌체=연합뉴스) 현윤경 특파원 = "15년 전에는 객석을 채우기 위해 이탈리아 지인들의 손을 끌어다 앉혔는데, 이제는 선전이 필요 없을 정도로 성장해 감개무량합니다."
봄이 움트는 매년 3월, 르네상스 문화의 보고인 이탈리아 피렌체에서는 어김없이 한국 영화의 성찬이 차려진다.
2003년 처음 발을 떼 올해로 꼭 15년째를 맞은 제15회 피렌체 한국영화제가 지난 23일 피렌체 라 콤파냐 극장에서 개막해 오는 31일 폐막한다.
김지운 감독의 '밀정'으로 막을 연 올해는 최신작 '아가씨'를 포함해 박찬욱 감독의 장·단편 15편을 소개하는 회고전과 한국 영화를 통해 한국 여성의 모습을 짚어보는 특별기획전 K-우먼 섹션이 마련되는 등 상차림이 더 풍성해졌다.
해외에서 열리는 한국영화제로는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이 영화제는 첫 회부터 영화제를 기획해 이끌어온 리카르도 젤리 영화제 집행위원장과 장은영 커플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던 젤리 씨는 영화제가 해를 거듭하며 성장하자 아예 '태극기·토스카나 코리아문화협회'라는 공연기획 단체를 설립, 피렌체 한국영화제 집행위원장을 맡아 이탈리아 각지에 한국 문화를 소개하는 행사를 여는 데 전념하고 있다.
20여 년 전 이탈리아 유학길에 올라 현재 가방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는 장은영 씨는 피렌체 한국영화제를 전후한 기간에는 생업에 종사하랴, 영화제를 챙기랴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이다.
영화제 기간 라 콤파냐 극장에서 만난 두 사람은 "초창기에는 이탈리아에서 틀 수 있는 영화를 한국에서 섭외하는 것은 물론 객석을 채우는 것까지 힘들지 않은 일이 없었다"며 "처음 몇 년 동안 김동호 부산영화제 이사장이 적극적으로 영화제를 후원해주는 등 여러 사람들과 단체, 기업들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다"고 지난 날을 되돌아봤다.
이 영화제는 한국 영화가 유럽에 거의 인지도가 없을 때부터 다양한 한국 영화들을 소개하는 한편 김기덕, 이창동, 김지운, 봉준호, 이재용 등 한국의 대표적인 영화감독과 전도연, 최민식, 송강호 등 대표 배우들을 초청해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에 한국 영화를 알리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올해 영화제 개막식에서 공로상을 수상한 김동호 이사장은 "2002년 월드컵 16강전에서 우리나라가 이탈리아를 꺾은 뒤 이탈리아에 반한 감정이 고조되자 문화를 매개로 이를 누그러뜨리려 창설된 피렌체 한국영화제가 15년째 순항하며 유럽과 이탈리아에 한국 영화를 알리는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흥미로운 비화를 공개하기도 했다.
다음은 젤리 집행위원장 부부와의 일문일답.
--15년 동안 이 정도 규모의 영화제를 꾸려 오는 게 쉽지 않았을텐데.
▲처음 몇 년 동안에는 예산이 턱없이 부족해 직접 포스터를 제작하거나, 가족들과 지인들을 동원해 행사 진행을 맡기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남한과 북한조차 제대로 구별할 수 없었던 이탈리아 사람들이 생소한 영화들을 좋아해 주는 것에 신이나 힘든 것도 잊고 매달릴 수 있었던 것 같다.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피렌체는 물론 이탈리아 전역에 소문이 나면서 이제는 사람들이 알아서 찾아오는 영화제가 된 것에 보람을 느낀다.(장은영)
--이번 영화제에서도 김지운, 박찬욱 감독의 신작 상영회에서 자정을 넘어서까지 관객들의 질의가 이어졌다. 이탈리아인들이 한국 영화에 대한 호응이 이처럼 뜨거운 이유는 뭐라고 보나.
▲한국 영화는 이야기가 독창적이고, 상업화된 할리우드 영화와는 달리 감독의 스타일이 살아있다. 또, 정형화된 뻔한 영화가 아니라 도발적인 영화가 많다는 점도 이탈리아인들을 사로잡는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또, 과거보다 한국이 이탈리아에 많이 알려지며 한국과 한국 문화 자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점도 작용했다고 본다.(젤리)
--앞으로는 영화제를 어떻게 끌고갈 계획인가.
▲뛰어난 작품을 만들지만, 아직도 이탈리아에 알려지지 않은 한국 감독들과 작품들이 무궁무진하다. 다양한 경향의 한국 작품들과 감독, 배우들을 이탈리아에 더 많이 소개하고 싶다. 올해 박찬욱 감독의 마스터 클래스를 처음 선보인 것처럼 단순한 소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감독과 작품에 대한 이해의 폭을 더 넓힐 수 있도록 영화제 기간 마스터 클래스를 꾸준히 개최하고, 한국과 이탈리아 대학끼리 연계해 양국 영화 학도들의 교류의 물꼬를 트는 역할도 구상 중이다.(젤리)
--영화제는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사실 본업은 본업대로 소홀히 할 수 없는 터라 영화제를 준비하는 게 힘에 부칠 때도 많다. 매년 '내년에는 다시는 안한다'고 다짐하지만, 이젠 영화제가 자식 같이 느껴지는 터라 그만두지도 못하겠다.(장은영)
애정을 워낙 많이 쏟아부어 살아있는 한 계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젤리)
ykhyun14@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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