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연합뉴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가원수직에서 파면된 지 3주 만에 결국 영어의 몸이 됐다.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세 번째, 임기 중 탄핵당한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이다. 1998년 국회의원 보궐선거 당선으로 첫발을 내디딘 박 전 대통령의 정치 인생은 이로써 19년 만에 치욕스러운 종언을 고했다. 오전에 시작된 법원의 피의자 심문은 자정을 넘겨 새벽까지 초조하게 이어졌다. 하나 영장이 발부되고 '미결수용자'로 전락하는 데는 2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구치소로 출발하는 박 전 대통령은 평소 즐겨 하던 올림머리를 풀고 화장도 지운 초췌한 얼굴이었다. 그 칙칙한 잿빛의 낯섦은 전직 대통령의 충격적인 급전직하를 상징하는 듯했다. 그를 좋아한 국민이나, 싫어한 국민이나 지켜보는 마음은 온전히 편하지 않았을 것이다. 꼭 인간적 동정심 때문에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다. 박 전 대통령의 불명예스러운 추락은 그 혼자만의 비극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국가의 비운이자 국민의 불행인 것이다.
영장 심사를 맡은 강부영 판사는 "주요 혐의가 소명되고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어, 구속 사유와 필요성, 상당성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박 전 대통령은 법정에 나가 판사 앞에서 혐의 사실을 부인하는 진술을 했다. 하지만 강 판사는 박 전 대통령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강 판사는 특히 검찰이 소명한 뇌물수수 혐의의 타당성을 인정한 것 같다. 박 전 대통령한테 적용된 혐의는 13가지나 되지만 영장 발부를 결정한 것은 뇌물수수였다고 봐야 한다. 검찰은 구속 만기일인 4월 19일까지 박 전 대통령을 재판에 넘겨야 한다. 하지만 대선 선거운동이 공식적으로 시작되는 4월 17일 이전에 기소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본 재판은 대선 이후에 시작될 듯하다. 재판에서도 초점은 뇌물죄의 인정 여부다. 검찰이 특정한 뇌물액은 433억 원이나 된다. 뇌물은 1억 원만 유죄로 확정되어도 10년 이상 징역 또는 무기징역에 처할 수 있다. 다른 범죄가 추가로 인정되면 45년까지 유기징역이 가능하다. 박 전 대통령이 재판부의 선처를 기대하려면 스스로 범죄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박 전 대통령은 지금까지 혐의사실을 완강히 부인해왔다. 무거운 형량이 두려워 태도를 바꿀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전직 대통령으로서 국민의 상처를 보듬고 다시 화합으로 이끈다고 마음먹는다면 어려운 일도 아니다. 3.2평의 독방에 갇힌 처지에 절망하지 말고, 바다 같이 넓은 포용의 도량을 열기 바란다.
박 전 대통령의 구속수감은 우리 헌정사에 중요한 변곡점이 될 것 같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한층 더 단단한 반석 위에 올려놓은 상징적 사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도 법을 어기면 헌법재판소에 의해 파면당할 수 있고, 보통 사람과 똑같이 법의 심판대에 서야 한다는 진리를 새삼 국민에게 보여줬다는 점에서 그렇다. 힘 있는 소수가 아니라 법에 따라 국가가 운영되는 '법의 지배' 원칙을 만천하에 천명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훗날의 역사는 박근혜 정부를 공적보다 과오가 많았던, 실패한 정권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일일이 열거하기도 구차스럽지만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서 드러난 권력층의 전횡만 봐도 그 폐해는 상식적 관용의 범주를 훌쩍 벗어난다. 그러나 정부의 실패를 비판하기에 바쁘고, 앞다퉈 집단적 냉소와 좌절에 빠진다면 또 다른 실패를 자초하는 것과 다름없다. 당장 차기부터 시작해 미래의 정부와 국가 지도자는 박근혜 정부의 실정을 '반면교사'로 삼아 이런 비극적 사태를 재연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또 다른 문제가 개헌이다. 현 사태를 오롯이 박 전 대통령 개인의 잘못으로 치부하는 것은 사리에도 맞지 않고 국가의 미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제왕적'이라는 반민주적 수식어를 달고 있는 지금의 5년 단임 대통령제는 오래전에 그 역할과 수명을 다했다. 당장 박 전 대통령의 파면과 구속수감이 생생한 반증이다. 그런데도 대선 주자라는 사람들이 개헌을 남의 일 쳐다보듯 하는 것 같아 심히 개탄스럽다. 안 한다고 일부러 부정하지 않지만 똑 부러지게 하겠다는 것도 아닌, 엉거주춤한 자세가 정말 볼썽사납다. '사람이 문제지 헌법이 무슨 문제냐'는 식의 큰소리는 너무 오만하다. 국민을 현혹하는 태도이고, 속 보이는 권력욕일 뿐이다. 민주주의의 발원은 불완전한 개인, 즉 국왕의 지배를 타파하고 대신 법과 제도의 지배를 세운 것이다. 아무리 훌륭한 인격을 갖췄어도 국왕 개인의 지배보다는 법의 지배가 낫다는 결론을 딛고 있다. 헌법상 국가 권력의 실소유주는 국민이다. 임차인으로서 그 앞에 당당히 고개를 들 수 있는 정치인은 우리 곁에 그리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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